우동집 사장 박경수씨 지하 방 딸린 10평 가게서 '국물 맛 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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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씨 부부가 수원에서 운영 중인 우동집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변선구 기자

수원 팔달구에서 우동 전문점 '육우동'을 운영하는 박경수(42)씨에게 2004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해다.

보증 한 번 잘못 서는 바람에 단란한 가정이 순식간에 벼랑으로 내몰렸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씨는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그는 인하대를 졸업한 뒤 삼성생명에 입사해 서울과 부천 등지에서 15년간 근무했다. 보험설계사들을 관리하는 영업소장과 지사의 마케팅 과장 등을 맡았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동갑내기 부인과 결혼해 중학 1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인 남매를 뒀다. 결혼 때 장만했던 수원의 32평 아파트가 차츰 좁아진다고 느꼈을 뿐, 크게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2003년 영업소장 발령을 받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10년 이상 영업소장을 해봤던 그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생활을 하기가 싫어 사표를 던졌다.

할 일을 준비해둔 상태는 아니었지만 퇴직금 등을 모아 창업하면 사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업 아이템을 고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년 가깝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난데없는 채무독촉장이 날아들었다. 몇 년 전 보증을 서준 회사 선배의 빚 2억원을 대신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집을 팔고 퇴직금을 얹어 빚을 청산했다. 수중에 남은 돈은 1000만원이 채 안 됐다.

급한 대로 수원 월드컵경기장 부근의 카센터 옆 건물 1층을 빌렸다.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지하실이 딸려 있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이곳에서 그는 자장면과 우동.돈가스를 파는 야식집을 시작했다.

처음엔 손님이 영 들지 않았다. 장사 경험도 없고 음식도 몰랐기 때문이다. 첫날 18그릇, 일주일 뒤 30그릇이 팔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박씨 부부는 다른 곳엔 없는 독특한 맛을 개발했다. 다시마 등으로 우려내는 일반 우동과 달리 사골을 우려내 진하고도 개운한 국물 맛을 냈다.

음식의 질을 유지하는 데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팔고 남은 재료는 아까워도 모두 버렸다. 음식 맛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아예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한두 달 뒤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오후 6시 문을 열어 다음날 새벽 6시에 닫기까지 가게 앞에 손님들이 장사진을 쳤다. 가게 앞 대로 양편엔 손님들이 타고온 승용차가 100m 이상 늘어섰다. 재료가 동나 새벽 1~2시에 일찍 문을 닫기 일쑤였다.

1년여 뒤 박 사장의 가족은 근처 빌라로 옮길 수 있었다. 이달 초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인계동 KBS센터 앞으로 가게를 확장 이전했다. 수원의 한 대형 할인점으로부터 분점을 입점시켜 달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햇살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에 살면서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한 가족이 너무 고맙다"며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가족간의 유대가 훨씬 강해진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고현곤(팀장), 양영유.정철근(사회부문), 나현철.김준술.손해용.임장혁(경제부문), 장정훈(디지털뉴스부문), 변선구.최승식(사진부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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