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일 엄마는 외출중(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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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정교육 실종… 예절도 몰라/권위상실한 섣부른 서구식 평등주의가 문제
『선생님,내가 치는 거 칠 수 있어요?』
『아니,선생님은 바이엘을 못 친단다.』
『그럼 나 이 학원 그만둘래요. 난 실력없는 선생님은 싫더라.』 지난 2월 서울 신당동에서 피아노 학원을 차린 양모씨(25ㆍ여)는 이기적이고 버릇없이 커가는 요즘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실망과 회의만을 매일 채워간다.
레슨비를 내면서 『선생님,월급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어린이,면전에서 음담패설까지 늘어 놓으며 낄낄거리다 야단좀 칠 경우 『나만 왜 그러느냐』며 대드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결석한 만큼 레슨비를 돌려 달라고 우기는 아이도 있어 양씨의 일과는 결코 보람된 「교사의 하루」가 아니다.
국민하교 다니는 아이들이 예절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싶어 이해하려고도 하지만 그럴수록 『가정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시키길래…』하고 학부모들에 대한 원망을 떨칠 수가 없다는 게 양씨의 실토다.
『자식 키우기가 겁나요. 걸핏하면 토라지죠. 그나마 나무라려고 하면 「우리세댄 다르다」며 대들기 일쑤예요.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청소년들의 성장과정에서 으레 나타나게 마련인 「반항심리」가 요즘엔 단순한 세대갈등을 넘어 기성세대의 권위실추나 가정의 교육적 기능 상실을 가져오는 예가 보통이다.
『우리 아이는 통 욕심이 없어요. 매사에 수동적이고….』
『중3인 우리 딸은 부엌일을 싫어해요. 엄마가 직장에 다니느라 바쁘면 좀 도와줄 줄도 알아야 하겠건만….』
서울청소년상담연구소가 주관하는 「슬기로운 자녀교육을 위한 어머니모임」에 비친 기성세대 가정교육관의 단면이다.
이 모임을 주관하는 이명용소장은 『어머니들의 이러한 호소 이면에는 급격한 도시화ㆍ핵가족화에서 가풍도 없이 섣부른 서구식 평등주의ㆍ기능주의ㆍ개인주의에 자녀들이 매몰되도록 방치한 부모들의 책임이 한결같이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저 「대화가 안 통한다」 「건방지다」는 따위의 말로 자녀들의 요구ㆍ주장수용에 인색한 부모들과는 반대로 청소년들이 겪는 고충과 불만,하고 싶은 말도 많다.
「큰인물 콤플렉스」에 걸려 집안어른 앞에선 헤프게 웃을 수조차 없는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 서울B고 1년 한모군(16).
학교ㆍ학원ㆍ교회이외엔 다른 곳엔 들를 겨를이 없이 생활하다 끝내 가출도 해봤지만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까지 해야 했던 S고 2년 이모군(17).
자녀교육보다 부동산ㆍ주식시세에 더 관심이 많은 엄마밑에서 그래도 두 동생을 생각해 몸가짐에 조심하려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외박과 유흥업소 출입을 자주하는 서울M여고 3년 오모양(18).
무크지 『민들레가 전하는 말』 발행인 이정환의 상담일지에서 나타난 비교육적 가정의 실태는 과잉기대ㆍ과잉보호ㆍ대화결핍ㆍ세대갈등ㆍ결손가정 등으로 요약된다. 이 모두 「교육적 부모상」의 결여문제로 마주친다.
『우리집 가훈이 뭐죠 아빠?』
며칠전 저녁식사 도중 중학교에 갓 들어간 둘째아들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은 서울 P국교 박모교사(43)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급훈을 하나씩 생각해 오라는 숙제에 골몰하다 가훈을 참고하려고 했던 아들 앞에서 가훈이 없는 것에 대해 도무지 면목이 안섰던 것이다. 가훈이 없다는 것은 바로 가정교육의 상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가정은 아이들이 하나의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는가. 이에대해 자신있게 『그렇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 가정의 모습을 「교육적 기능이 상실된 가정」이라고 인식할 뿐이다.
부모는 자녀의 「최초교사」라는 인식은 고사하고 자녀교육을 학교성적만으로 연결지으려 한다든가,단순한 양육차원에서 소임을 끝내려는 게 현대가정의 적지않은 실상이다.
가정이 교육적 기능을 가지려면 특히 아버지의 권위가 전제돼야 하나 실제론 형식적 가부장권도 약화됐을 뿐 아니라 자녀의 대화상대로서,또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다할 만큼 신뢰를 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늘어만 간다.
이른바 「아버지 부재현상」. 서울 T고가 전교생 1천8백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 『아버지가 하숙생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응답이 무려 44.2%나 됐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다 핵가족화 현상으로 인해 어머니의 가정에서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되었으나 여성의 사회진출 증대에 따라 「어머니 부재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같은 현상은 맞벌이 가정과 결손가정(66년 12.5%에서 85년 20%)의 증가와 맞물려 가정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이재창 홍익대교수는 『신분의 수직상승 욕구에서 비롯된 무분별한 자녀교육열은 자칫 자녀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대리충족의 수단으로 보기 쉬운데도 이에대한 자각이 아주 낮다』고 했다.
부모들의 비뚤어진 가정교육관은 결국 자녀들의 중압감을 가중시켜 자살ㆍ탈선 등 사회문제로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다.〈안남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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