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정보 공개 안 해 갈등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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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홍릉의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열린 'FTA 합의 형성' 토론회에서 상품.무역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요 쟁점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한.미 FTA를 놓고 그동안 수많은 토론회가 열렸지만 참석자들이 자기 주장만 고집하면서 억지 논리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어 오히려 갈등만 더 키웠다는 지적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중앙일보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보 교환을 통해 먼저 사실부터 확인한 뒤 쟁점 견해차를 좁혀 나가는 방식의 토론회를 준비했다. 전문가들의 '합의'를 목표로 청중이 없는 가운데 열린 FTA 토론회는 처음 시도된 실험이다. 참석자들은 분야별로 마련된 2평짜리 방에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합의점을 찾아내기 위해 3시간이 넘도록 '끝장 토론'을 시도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본궤도에 올랐다. 6일부터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는 3차 협상에선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그러나 국내 찬반론자들의 대립각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숱한 토론회가 열렸지만 서로 목청만 높일 뿐 타협 접점을 찾는 노력은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과 중앙일보는 지난달 31일 서울 홍릉 국제정책대학원에 학계.연구소.시민단체 전문가 20명을 초청해 FTA 쟁점에 대한 '합의 형성' 토론회를 열었다.

◆ 아직은 갈 길 먼 '국내 협상'=상품.무역, 보건.의료, 농업, 금융.투자 등 4개 부문에서 각각 4명의 전문가가 3시간 넘게 토론을 벌였다. 주된 논제는 FTA의 효과와 영향, 1.2차 협상에 대한 평가, 3차 협상의 과제 등이었다. 토론마다 설전(舌戰)이 꼬리를 물었고, 때론 고성까지 오갔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불꽃 튀는 다툼 속에서도 많은 쟁점이 벼랑 끝 대치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참석자는 '불완전한 정보 공개'를 FTA 국내 협상의 최대 장애물로 꼽았다. "정부가 전문가들에게 협상 정보를 100% 공개해야 여론 왜곡을 막는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카드를 노출하면 협상력이 약화할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알려 소모적인 갈등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보건.의료에선 정부의 '약값 절감 방안(의약품 선별적 사용)'을 미국이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견해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큰 진전"이라는 평가에 맞서 "미국이 자국 제약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 16개 조항을 요구한 만큼 한국의 약값 제도가 무력화될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논리가 여전했다.

농업 분야에서는 개방 대상에서 빼야 할 '민감품목'의 수(현재 약 280여 개)가 적당한지를 놓고 다툼이 있었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인 농업 보조금 지급을 문제 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언쟁이 오갔다. 자동차 시장 개방도 한국 업체들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와 아직 기술경쟁력이 약해 피해가 클 것이란 주장이 부딪혔다. 농업 부문의 사회를 맡은 박노형(법학) 고려대 교수는 "토론을 지켜보니 정부와 비정부, 그리고 이해관계자 사이의 신뢰가 끊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꼬집었다.

◆ 'FTA 갈등 해소' 실마리 보였다=토론이 무르익으면서 일부 쟁점들에 대한 합의가 극적으로 도출되기도 했다. 서로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각자 미처 알지 못한 사실관계나 정보가 튀어나왔고 이에 따라 입장차가 줄어드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의약품 개방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던 보건.의료 분야는 "건강보험 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협상 조항은 배제해야 한다"는 합의가 나왔다. 반대 진영은 "의약품 특허와 지적재산권 조항에서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면 건보 재정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찬성 쪽도 "제약산업 구조조정 등의 긍정적 측면은 받아들이되 유사의약품에 대한 자료 독점권 등은 강력하게 방지해야 한다"며 동의했다.

금융.투자는 신(新)금융서비스와 관련해 "열거주의 개방 방향은 긍정적"이라는 데 참석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열거주의는 개방대상인 서비스만 부속서에 제한적으로 명시하는 소극적 방식이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당초 반대 측은 "미국이 다양한 상품을 통해 국내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찬성 측이 "그런 이유 때문에 열거주의 등으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견이 해소된 것이다. 특히 3차 협상과 관련해 "자산운용.보험중개업 개방은 최대한 수세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공감대도 이뤄졌다.

상품.무역 분야에선 "개성공단 원산지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사회를 맡은 정영진(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개성공단 생산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에 대해 '정치적 요인을 배제하면 FTA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으므로 정부가 굳이 해결하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찬반 양측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토론회를 준비한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박진 교수는 "이날 토론을 통해 '정보 격차' 없는 솔직한 의사소통이야말로 FTA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김준술 기자<jsool@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 참석자 명단

▶김충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김형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백일 울산과학대 유통경제학과 교수▶송유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팀장▶신형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책국장▶이의경 숙명여대 임상약학대학원 교수▶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장상환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장석인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실장▶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최세균 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최원목 이화여대 법대 교수▶한두봉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한홍렬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가나다 순)

▶사회=박노형 고려대 법대 교수(농업분야), 손욱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금융.투자 분야), 이규식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보건.의료 분야), 정영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상품.무역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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