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강수진의 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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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에서 '세일즈의 신(神)'이라 불리는 하라이치 헤이(原一平)가 69세 때 강연을 했다. 청중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영업을 잘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하라이치는 주저 없이 양말을 벗고 자신의 발을 만져 보라고 권했다. 발바닥을 만져본 질문자는 "굳은살이 너무 두껍다"며 깜짝 놀랐다. "저는 그저 남보다 많이 걷고 뛰었을 뿐입니다." 하라이치의 답이었다.

한국의 발은 발레리나 '강수진 발'이 아닐까 싶다. 강수진의 두 발 사진을 보는 순간 이게 사람의 발인가 하는 충격에 시선을 떼기 어렵다. 뭉개지거나 갈라진 발톱, 발가락마다 옹이처럼 튀어나온 뼈, 버섯 모양으로 퍼진 엄지발가락. 기괴하게 일그러진 그 발을 보며 많은 이가 전율을 느낀다.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고도 한다. 1985년 동양인 최초의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1위, 9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주역 무용수, 99년 무용의 아카데미상 브노아 드 라 당스에서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 수상 등 세계적 발레리나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살인적 연습의 반복이었다. 하루에 적게는 15시간, 많게는 19시간 연습을 했다. 남들이 2~3주에 걸쳐 신을 토슈즈 네 켤레를 단 하루 만에 갈아신기도 했다. 발에 땀이 차고 물집이 잡히는 건 기본. 사시사철 발톱이 빠지고 살이 짓무르면서 피가 난다.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 때문에 고름이 흐르기 일쑤다. 토슈즈를 벗을 때엔 생살을 떼는 아픔을 느낀다. 피와 고름.살이 슈즈에 한데 엉겨붙은 까닭이다. 오죽하면 발가락 사이에 쇠고기를 끼워 고통을 줄이려 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게 육체적 통증이라고 한다. 간혹 아프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어, 왜 안 아프지. 어제 연습을 게을리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부터 든다는 게 강수진의 고백이다.('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장광열 지음)

강수진이 최근 한국을 찾았다. 자신이 아끼는 발레 슈즈 한 켤레를 경매에 내놓았다. 경매 마감일은 4일. 판매금 전액은 후학 양성에 쓰인다. 또 그 유명한 오른발은 본을 떴다. 청동 조각품으로 만들어 전시할 예정이다. 강수진의 후학 지도가 한창일 때 정부는 미래의 희망을 그린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그러나 핵심인 재원 마련 방안이 불투명하다. 그런 비전에 혹하기보다 '강수진 발'을 한 번 보는 게 백배 낫다. 새로운 삶의 열정이 생길 테니까.

유상철 국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