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안되게 "운영의묘" 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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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이미 91년1월1일부터의 시행시기가 잡혀있는 금융실명제는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딛고 서 있는 토양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쟁기」를 대고 갈아 엎는 대수술이다.
따라서 후대에까지 물려줄 항구적인 체제로서의 의미로 보나, 당장 정치· 경제· 사회에 몰고을 영향의 파장으로 보나 금융실명제는 예컨대 요즘 추진되고 있는 정계개편과 같은 일보다 더 중요하고 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은 경제의 핏줄이고, 금융실명제는 그같은 금융거래 하나하나에 주민등록증을 대조하여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간단하기 짝이 없는 그같은 변화 하나가 바로 경제나 사회의 「체제」 자체를 새로운 틀로 재구성하는 엄청난「변혁」을 몰고 오게된다.
원칙에 충실한 실명제 아래서는 부의 일반적인 세습은 기껏해야 2∼3대만에 끊기고 만다.
주식 임자의 실체가 드러나 상속세와 증여세가 법에 정해진대로만 매겨지면 기업의 항구적인 「가족경영」은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실명제로 인해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이 현실화되기만 한다면 부의 정당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이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문제, 재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의 통념, 심각한 노사분규등은 사라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물타기 증자와 같이 자본이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갈등도 상당부분 해소될 수가 있다.
또 실명제는 우리사회의 「뒷돈거래」의 여지도 크게 줄여놓을 것이다.
뒷돈 거래는 노출을 꺼리는 법인데 실명제 아래서 굳이 뒷돈 거래를 하려면 큰 불편을 감수하면서 현금뭉치를 들고 다닐수 밖에 없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5공비리중의 하나인 정치자금의 문제도 실명제 아래서는 굳이 증인의 입을 열기 위해 닥달할 필요가 없이 법관의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금융거래를 추적하면 대부분 밝혀낼 수가 있을 것이며, 공직자의 재산등록과 같은 제도도 필요가 없게 된다.
원칙에 충실한 금융실명제가 가져올 수 있는 우리 사회의「새로운 틀」 은 그만큼 신선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같은 실명제의 이상적인 모습 스스로가 실명제의 실시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들이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국가간의 자본거래나 국내에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라면 모르겠으되 실명제가 오랜 세월의「관행」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의「제도개혁」으로 실시된다고 할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가 있는 일이다.
세금 때문이든, 비밀 때문이든 계속 숨어있기를 원하는 금융자산들은 은행과 증권시장을 미리 빠져나가 부동산·골동품등 실물자산으로 들어가 숨을 것이요, 아예 나라밖으로 터전을 옮겨버리는 도피행각도 일어날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은행이 금리를올리고 내리듯 했다가는 국내금융시장이나 국가경제전체가 단번에 무너져내리는 일이 현실로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내년 1월1일부터 실명제가 실시된다는 예고와 정책의지가 여러번 거듭하여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와같은 층격과 부작용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명제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확정된 것이 아직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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