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北核, 실용적 합의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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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이 끝난 지도 40여일이 흘렀다. 그러나 제2차 회담은 아직 불투명하다. 설령 6개국 대표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가지고 수십번의 회담을 개최한다 해도 각국의 주장과 입장만을 반복한다면 '회의'만 춤출 뿐 건설적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6자회담 결과 북한은 경제지원과 체제보상을 희망했으며 미국은 북한 핵.미사일 등의 포기, 검증, 유통 차단을 1순위로 삼았다. 북한은 핵을 먼저 포기했는데 경제 지원도 받지 못하고 북한 체제가 무력으로 진압당하는 것을 최악의 상황으로 그리고 있다. 반면 미국은 1994년 제네바합의처럼 북한이 지원금만 받고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대량살상무기를 유통시키는 상황이 재판되는 것을 우려한다. 결국 북한은 선 핵포기 대신 동시해결 원칙을, 미국은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공개성.문서화.다자보장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결국 6자회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불신과 불확실성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의 핵 신용불량자인 북한을 상대로 핵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6자회담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위적으로라도 신뢰를 조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서로 잘 알지 못하거나 믿을 수 없는 국가 간에 새로운 거래를 시작할 때 기도하는 에스크로(escrow)를 고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에스크로는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매매 보호 서비스인데 위험 부담과 법적 하자를 최소화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예컨대 A와 B가 기업을 매매할 경우 제3자인 변호사나 은행을 에스크로로 선정한다. 매매대금은 B에게 직접 전달되기 전에 에스크로 계좌에 보관되며, 에스크로가 B의 신용.매매물 상태.법적 하자를 철저히 검토한 뒤 하자가 없으면 매매대금을 B에게 전달한다. 하자가 발견되면 재협상하거나 에스크로 계좌에 있던 대금은 A에게 되돌아가고 계약서는 무효가 된다. 그런 까닭에 미.소의 탄도미사일 감축 협상 당시에도 전략적 에스크로 개념이 활용되었으며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선진국의 경제 지원과정에서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이 종종 에스크로로 이용돼 왔다.

북한 핵 해법에 에스크로를 적용할 경우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담은 합의문서에 따라 북한은 핵.대량살상무기 폐기.감축을 실행하고, 5개국은 대북 경제지원 비용을 분담하며 ADB 또는 월드뱅크와 같은 국제금융기관이 에스크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네바 합의처럼 상징적인 합의문이 아닌 치밀한 상호 이행조건이 명시된 실용적인 합의문이 필요하며 각자의 분명한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먼저 5개국은 합의된 금액이나 현물을 국제 금용기관의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사찰과 검증과정을 통과할 경우 예치금은 북한 경제 발전 기금으로 사용되겠지만, 사찰이 거부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합의는 무효가 되고 예치금은 다시 회수된다. 이렇게 북한 경제발전 기금을 위해 예치된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면 관련국들은 대북 햇볕정책이나 중유지원 때와 달리 대북 퍼주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우크라이나 비핵화 양해각서처럼 계약이 이행되는 동안 북한이 다른 국가로부터 핵공격을 받을 경우 유엔이 즉각적으로 개입해 북한을 보호한다는 조항을 삽입한다면 북한이 우려하는 체제 보장이나 불가침의 문제도 해소될 수 있다. 동시에 에스크로는 북한에 대한 신용회복의 기회가 되어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게 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6자회담이 평화적으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탁상공론이나 벼랑끝 외교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지루한 회담도 전쟁보다는 낫다'(Jaw, jaw is better than war, war). 그러나 그러기에는 북핵 위기가 너무도 급박하지 않은가.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