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경제의 허리(중견기업)'가 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중소제조업체 H사는 2003년 직원 수가 290명에 이르자 고민에 빠졌다. 사업은 자꾸 커져 직원을 더 늘려야 하지만, 상시 근로자가 300명을 넘는 순간 법적으로 중소기업 범주에서 벗어나 13가지나 되는 세금 혜택 등 각종 지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결국 자회사를 세우고 조직을 슬림화해 계속 중소기업 울타리에 머무르고 있다. 중견기업을 흔히 '경제의 허리'로 치켜세우지만 대접은 소홀하다. 기업 체계를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으로 분류할 때 중견기업은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소외돼 왔다는 불만이 높다. 열심히 회사를 키워 중소기업을 졸업하는 순간 각종 지원과 혜택이 날아가 버리고 '대기업'으로 규제받기 시작한다. 휴대전화 케이스를 생산하는 재영솔루텍의 최광 차장은 "매출액과 규모 면에서 중소기업을 막 벗어났다고 정부 지원을 확 줄이면 큰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중소기업에서 벗어나면 중소기업 육성 지원금 규모가 50% 이내로 줄어든다. 각종 대출 금리 혜택도 없어지면서 연 2~3%포인트 오르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규모를 더 키워 자타가 공인하는 대기업이 되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국내 매출 기준 200대 기업 중 1970년대 이후 창업한 곳은 웅진코웨이가 유일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 초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93년 중소 제조업체에 속한 기업 중 10년 뒤에도 생존한 기업은 25.3%에 불과했다. 이중 중소기업 기준을 졸업해 성장한 곳은 75개 뿐이고, 500인 이상 업체로 큰 곳은 0.01%인 8개에 불과했다. 8개사 중 매출 1조 원 이상 대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는 한 군데 뿐이다. 이런 현실은 경쟁력있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대신 중소기업의 보호막에 안주하는 편법을 택하게 만든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 초 종업원 300~1000명인 제조업체 663개 중 3년간 중소기업 유예기간에 해당되는 56개사를 조사한 결과 58.9%가 중소기업 복귀를 희망했다. 17.9%는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을 분사하거나 자회사를 설립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다른 통계를 보면 근로자 수가 280명~300명 사이 기업들은 평균 자회사 수가 3개다. 이 때문에 중견기업은 자꾸만 줄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종업원 300명~1000명 사이의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감소 추세를 보인 반면 중소기업은 대폭 증가했다. 산업자원부 보고서에 따르면 종업원 수가 300~320명에서 320~340명으로 넘어갈 때, 그리고 매출액이 400억~450억 원에서 450억~500억 원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기술 및 가격 경쟁력이 급격히 비약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중견기업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현실은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런 현실은 정부 정책에서 중견기업이 철저히 소외받아온 데에서 기인한다. 전현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전무는 "중소기업의 경우 지원책이 너무 많아 실제로 어떤 혜택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지만, 중소기업을 졸업한 중견기업들은 3년 정도 유예기간이 지나면 바로 대기업 규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은 18개 부처에서 10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런 문제점에 눈을 돌려 지난해 이혜훈.황우여.엄호성 의원 등 13명이 '중견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법은 제조업의 경우 상시근로자 300명 이상 1000명 미만, 또는 자본금 80억 원 초과 1000억 원 이하인 기업을 중견기업으로 분류해 규제완화와 세제 등 혜택을 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법은 발의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이혜훈 의원은 "몇 안되는 중견기업을 위한 법이다 보니 정치권에서 '표'가 된다는 생각을 안 해서 그런지 주변에서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윤봉수 한국중견기업연합회장은 "국가경제가 발전하려면 대기업이 앞에서 중견기업을 이끌고 중소기업이 뒤에서 밀어주는 형태의 산업구조가 되야 한다"며 " 중견기업의 고속성장을 돕는 정부 차원의 맞춤형 정책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 김태윤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