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씨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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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앞으로 「뛴다」고만해서 세월을 잘 보내고 맞는 것은 아니다. 원고지 앞에서의 고독한 밀실작업인 문학에 있어서야 도무지 「뛴다」는 개념이 어울릴 수 없다.
적막한 자기응시로 정직하게 곰삭을대로 삭은 체험을 퍼올리는, 아니 감동으로 떠오르도록 기다릴줄도 아는 작업이 문학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현실적공간으로 뛰쳐나와 요란스럽게 뛴 80년대 문학의 흐름속에서 자신의, 문학의 자존을 묵묵히 지켜낸 소설가 이청준씨(51)·소설가라는 천직때문에 그의 새해설계는 화려하지 않다.
『50이면 지천명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소설을 인위적으로 제작하고 당위적으로 쓰는데서 좀 벗어났으면 합니다. 자연스럽게 소설이 솟아올라 시대적 삶과 일치되는 작품을 얻었으면 합니다. 올해 특별한 계획은 88년 발표한 장편 「아리아리강강」후편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65년 등단, 거의 외도없는 문단생활 25년여에 1백50편 가량의 장·중·단편을 발표한 이씨는 과작의 작가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무게 있는 문제작들로 항상 문단의 주목을 끌어왔다. 그만큼 이씨가 작품발표에 신중을 기해온 탓이다. 『최고에 이른 곳에서만 작품을 쓴다』고 스스로 밝혔듯 이씨는 내적·외적상황이 최고에 이르는 순간을 기다릴줄 안다.
지난해말 발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장편 『자유의 문』도 78년에 탈고한 초고를 고치고 고쳐 12년만에야 내놓은 것이다.
『물론 내 마음에 차지 않아 발표하지 않았지요. 또 작품 전반부에 묘사된 빈부격차나 노사문제가 사북사태등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해 발표를 꺼린 것도 사실이고요.』
장편 『자유의 문』은 극단적 신념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임을 절대선을 추구하는 계율주의자와 소설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작가의 대결을 통해 보여 준다. 80년대의 암울한 터널을 뚫고 나온 시점에서 이씨가 12년간이나 간직하다 던진 메시지다.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다 쫓기고 있었습니다. 80년대 내 소설의 주제도 그 쫓고 쫓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대로 보면 80년대 같이 명백한 시대도 없었으나 문학적으로는 명백하지 못했습니다. 80년대의 우리소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소명감을 갖고 당위적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설이 삶에 대한 결단과 방향을 강요하는, 독자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했지요.』
80년대가 명백한 시대였던 만큼 소설이 소명감을 갖고 당위성을 강조, 오히려 독자의 자유를 억압한 감이 없지 않았다는 이씨는 소설은 작가나 독자에게 해방이어야 된다고 밝힌다.
『내가 추구하는 소설은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삶의 마당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간섭대신 공감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자에게 공감을 주어 삵에 대한 관용과 여유를 갖게 하기 위해선 작위적이거나 허세를 부려선 안되고 정직하게 작가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작위보다 정직한 자기응시와 떠오름을 강조하는 이씨는 때문에 자신의 깊은 곳에 쌓이고 쌓인 것이 자신과 세상을 배반하지 않고 감동으로 울려나올 때를 기다린다. 마음의 숨통을트기위해 1년의 3분의1 정도는 오르락내리락하며 고향에서 보내겠다면서. 90년에도 이씨는 뛰지 않는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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