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천덕꾸러기 된 상품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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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더 이상 상품권을 바꿔드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갖다 버리란 말입니까."

24일 오후 서울 종로의 한 상품권 교환소. 업주와 손님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성인오락실에서 경품으로 받은 상품권 30여 장을 환전하는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이다. 이 업주는 "상품권이 곧 휴지조각이 될 마당에 추가로 환전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가 찾은 서울 시내 성인오락실에선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환전 중지'를 써 붙이거나 아예 교환소를 폐쇄한 곳도 많았다. 강남구 논현동 일대에는 10여 곳의 성인오락실 전체가 셔터를 내린 상태였다. 상품권 가맹점인 영화관이나 서점들도 "경품용 상품권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내걸고 있었다. '도박용 칩'으로 사용되던 상품권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이다.

정부는 2002년 2월 성인오락실의 경품으로 상품권을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당시 취지는 그럴듯했다. 오락실에 이용객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상품권을 유통시킴으로써 도서.영화 등 문화산업의 활성화를 꾀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정부의 의도대로 될 턱이 없었다. 오락실에서 딴 상품권을 책 사는 데 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러니 성인오락실은 '교환소'라는 편법을 동원해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꿔줬다. 현금이 오가는 도박장으로 변질됐다. 결국 대한민국을 도박공화국으로 만드는 데는 상품권이라는 정부의 작품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상품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품권을 내년 4월 폐지하겠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유통되지 않는 수천억원대의 상품권을 떠안은 유통업자와 오락실 업주들은 줄도산에 처할 게 뻔하다. 기자가 만난 성인오락실 업주들은 "정부가 허가했던 상품권을 갑자기 폐지시켜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며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온 나라가 상품권을 둘러싸고 집단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최근 영화 '괴물'이 화제다. 한강에 유입된 독극물이 돌연변이 괴물을 낳아 시민들을 위협한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문화 활성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뒤에 또 다른 불순한 의도를 숨긴 탓에 '상품권 괴물'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주름진 서민 경제가 상품권 괴물 때문에 더 망가질까 걱정된다.

정강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