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평화의 종소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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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새해엔 평화의 종소리를 한껏 울리고 싶습니다』
서울 명동성당 종(종)지기 주인성 할아버지(70)는 80년대를 보내는 감회가 누구보다 깊다.
뜻하지 않게「민주화 진통」으로 표현되는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온갖 시위와 농성으로 이어진 현대 한국사의 한 장(장)을 고스란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6월 항쟁 무렵부터는 거의 하루도 편안히 종을 두드린 적이 없어요』
제야를 이틀 앞둔 29일 오후 성당「뾰족탑」 꼭대기 종루에서 만난 주씨는 지난 10년이 한마디로「혼돈의 세월」이었다고 했다.
주씨의 일터이자 평온한 신앙의 보금자리인 명동성당이「시위1번지」로 변한 것은 87년부터.
꼭 10년전인 79년부터 종지기 일을 맡은 주씨는 87년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후 인권회복 미사와 추모 규탄 집회가 잇따르며 성당과 함께 서서히「시국의 몸살」을 앓게된다.
박군 추모미사 때는 김수환 추기경의 뜻에 따라 박군의 나이수대로 21차례 타종했고 숱한 나날을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종을 두드려야 했다.
4월 들어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단 천막생활이 시작됐고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가 주최한 6·10대회 당일부터 6일 동안 계속된 대학생 5백명의 점거농성….
6월 내내 민주화요구시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최루가스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주씨는 이후 불과 며칠 전까지 줄잡아 2백여 차례에 걸쳐 정치집회와 노점상. 전교조 교사 등 각계각층의 시위·농성을 겪으며 희망과 함께 실망을, 동정과 함께 미움도 갖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자기 집단의 목소리를 자유로이 표출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대학생을 제외한 대다수의 폭력시위·농성 자세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 2∼3년 동안 성당구내 농성자들에게『고성방가를 하지 말라』거나『낙서나 모닥불을 피우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가 젊은이들로부터 십여차례 집단 구타를 당하고 안경이 세차례나 깨지는 수모를 당한뒤 자신의 골방으로 가 남몰래 울었다고 했다.
『6월 항쟁때는 농성학생들에게 밥까지 지어준 성당 측이 석달 전 정문입구에 철책 문까지 설치하게 된 것을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숱한 현장을 지켜보며 느낀 나름대로의「시위 철학」을 힘주어 말한다.
『아울러 90년대에는 자유로운 집회·시위가 보강돼 명동성당이 단골 농성장으로 이용되는 세태도 바뀌어야 하겠지요』
매일 오전6시·정오·오후6시면 어김없이 마흔 두번씩 종을 치는 주씨의 세례명은 아우스틴.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일제 때부터 청운 국민학교를 다니며 명동성당의 신자가 된 이곳의 터줏대감이지만 지금도 어릴때 듣던 맑은 종소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종은 깨끗한 마음으로 맑은 공기 속에서 사람을 담고 두드려야 제소리가 나는데…』
지금의 종소리가 아무래도 예전처럼 맑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주씨는 새해부터는 깨끗한 종소리를 바쁘고 지친 서울시민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명동성당이 농성장이 아닌 사랑의 장소로 바뀌고 개인적으로는 설립1백주년(98년)까지 종루를 지킬 수 있게되도록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6·25때 33살의 나이로 자원입대,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막노동과 강사·광산 일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기도 했던 주씨는 4남1녀가 모두 결혼, 손자가 5명.
사제관에서 기거하지만 1주일에 한번씩 종루를 떠나 부인 김종숙씨(61·반월 거주)와 만나는게 주씨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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