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外交 잘 해야 전쟁서 이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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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에 2천명씩 태운 전투부대가 베트남으로 향한 것은 38년 전 이맘때였다. 나는 세상에 막 나온 중앙일보의 첫 특파원으로 그 배에 타고 있었다. 병사들은 총을 닦을 뿐 말이 없었다. 그들의 침묵에 남중국해(海)의 거친 파도가 더욱 거세게 들렸지만 여름내 대한민국 국회에서 흘러나온 파병 반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 파병요청 없이 미국을 따라 전쟁터로 간다면 한국은 국제(여론의) 고아가 될 것"이라며 목이 멘 의원도 있었다. 외무부 장관이 부랴부랴 베트남 총리가 보낸 편지를 내밀자 "하룻밤 새 뒤바뀌는 사이공 정부의 초청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미국의 파병 요청서를 가져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지금 이라크가 베트남을 닮아가고 있다. 베트남과 지하드가 닮아서가 아니다. 승리를 선언했는데도 전쟁 때보다 더 많은 미군이 숨져 가는 게릴라전 양상이 범상한 일인가. 미국이 우리더러 군대를 보내 달란다. 안 보내면 휴전선의 미군을 빼내갈지 모르는 안보상황도 베트남 때를 빼닮았다.

서희와 제마의 깃발 아래 건설과 의료 지원단이 가 있지만 전투부대를 보내 지역을 통째로 맡아 달라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비둘기 깃발을 들고 공병과 의무부대가 나섰다가 추가 파병요청으로 정예부대인 청룡과 맹호가 출진했고 나중에는 백마사단이 가세하는 등 다섯 차례나 증파를 거듭했다.

베트남 때와 달리 이라크는 자비 원정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피 흘리기는 매한가지다. 테트(舊正)공세처럼 베트공의 기습에 미국 대사관이 일시 점령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반도 안보와 직결된 맹방이 궁지에 몰려 있기 때문에 파병하려는 것이다. 미국이 잘 나가는 전쟁이라면 갈 필요가 없다.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뚫으러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스위스가 아니다. 국제 안보협력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인가.

초당적 합의에 접근하기 위해 파병 반대 여론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나 뒤늦게 파병 조사단을 보내 건성 조사 시비를 낳는 것은 난센스다. 베트남 파병 때도 비밀리에 다녀온 조사단이 헛나갔었다. "베트남에는 고 딘 디엠(대통령)만 빼고 모두가 공산당이라 싸워봤자"라며 국토건설을 돕는 것이 낫다고 삽과 곡괭이 10만자루를 보낸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그래서 대통령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현대전은 대통령의 전쟁이다. 여론에 휘둘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결단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전쟁은 이기기 어렵다.

'국민투표'가 결단이라면 끝도 없이 터지는 정치부패에 대통령의 신임을 걸 것이 아니라 안보정책(파병)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합헌적일 뿐만 아니라 국론을 통일하고 국제위상을 높이는 길일 것이다. 베트남 파병 때 "대통령의 재떨이에 쌓이느니 담배꽁초였다"는 육영수 여사의 말이 떠오른다. 증파 때마다 "박정희, 내 아들 살려내라"는 어머니들의 호곡 속에 대통령의 외로운 결단은 내려졌던 것이다.

정책 결정자는 파병 찬반(贊反)을 넘어 어떻게 싸울 것이냐를 생각할 때다. 원정군은 잘 싸워도 걱정, 못 싸워도 딱하다. 잔혹성이 드러나도 탈, 몸을 사리다 허를 찔려도 낭패다. 베트남 때 그랬다. 심리전이 요체며 대민(對民) 활동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전투보다 외교를 잘 해야 전쟁에 이긴다. 파병은커녕 미국의 일방주의 전쟁 운영에 어깃장을 놓으면서 득을 보는 나라도 있고, 여론의 매만 맞고 물러서는 빈털터리도 있을 것이다. 부시가 부닥친 도전도 매한가지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파병은 1백달러 때와 달라야 한다. 사전준비 없이 실리를 추구하는 나머지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에 김칫국부터 마셔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을 돕기 위해 32개국이나 참여하고 있어 베트남 때와 다르다.

석유자원 확보만 해도 후세인 정부가 진 2천억달러에 이르는 빚에 강대국들의 이해가 몰려 미국의 입김에 한계가 있다. 전쟁은 카멜레온 같은 것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둔갑할지 모른다. 찬반으로만 짝 갈라질 것이 아니라 (파병이 불가피하다면)이라크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최규장 在美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