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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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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리스에 "배는 가장 가증스러운 야수"라는 말이 있다. 중국엔 "배부르고 따뜻하면 음란한 생각이 들고, 배고프고 추우면 도둑질할 마음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 작가 샤오춘레이(蕭春雷)는 '몸'(푸른숲 출판)에서 "배에는 육체의 가장 깊은 어둠인 굶주림과 빈곤,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 처절한 어둠이 인간의 행동은 물론 사유까지 조종한다고 보았다. 식욕과 성욕.권력욕 등 온갖 욕망이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뱃속에 번득이는 살기를 감췄던 이도 있다. 당나라 현종 때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주인공이다. 하루는 현종이 물었다. "엄정지(嚴挺之)는 어디 있는가." 엄은 이임보가 지방으로 내쫓은 충신. 질투의 화신 이임보는 엄이 중앙 요직에 발탁될까 겁이 났다. 꾀를 냈다. "높은 벼슬을 받기 위해선 폐하를 배알할 기회를 잡는 게 좋으니, 우선 신병을 핑계로 상경하고 싶다는 상소를 올리시오." 동생을 통해 이 말을 들은 엄은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이임보는 현종에게 "아무래도 늙고 몸도 약해 중책은 어려우니 한가한 자리를 맡기지요"라고 고했다. 나중에야 이임보의 농간을 깨닫고 울분이 치밀어 오른 엄은 병이 나 죽고 말았다. 중국 역사서 '십팔사략(十八史略)'은 간신 이임보를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고 평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연유다.

배를 드러내놓는 건 감출 게 없다는 뜻이다. 포대(布袋) 스님으로 불린 후량(後梁)의 선승 계차(契此)는 항상 배를 내놓고 다녔다. 감출 게 없이 베푸는 삶을 산 것이다. 배의 속까지 보이는 할복(割腹)은 결백을 증명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한나라 사람 융량(戎良)은 사통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자, 자신의 배를 갈라 결백을 증명했다. 당나라의 명신 안금장(安金藏)도 할복으로 자신이 모반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보였다. 일본 작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무사도(武士道)'에서 할복에 대한 변으로 "영혼의 창문을 열겠으니, 그곳이 붉은지 검은지 공정하게 판단해 주시오"라고 적었다. 여기서도 할복은 결백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선 "배 째 드리죠" 발언의 진위 공방이 한창이다. "그런 협박을 받았다"와 "내가 무면허 의사냐, 그런 일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시비는 빨리 가리는 게 좋겠다. 행여 "영혼의 창문"을 열겠다는 이라도 나올까 두렵지 않은가.

유상철 국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