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영역 굳힌 TV 미니시리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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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방송 드라마 부문에서 올해는 미니시리즈 형식이 정착한 한해였다.
연초에 시작됐던 KBS의『왕룽 일가』가 아기자기한 도시근교 농촌의 일상을 절제있게 그려 폭발적 인기를 끌며 새로운 드라마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이어『무풍지대』와 『절반의 실패』등도 내용상의 문제점에 관한 논란이 많았지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었다.
한편 MBC 미니시리즈도 비교적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였다.
7월에 방송됐던『제5열』은 권력 핵심부의 냉혹한 세계를 추리극 형식으로 밀도 있게 꾸며 주목을 받았다. 또 9월에 방송됐던『천사의 선택』은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을 깔끔하게 처리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주에 끝난『거인』도 요즘 젊은이들의 제각기 다른 인생관과 생활방식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줘 신선했다.
특히『거인』은 극중 반전의 계기를 6·29선언으로 잡고 원전 도입 과정에서의 부정을 소재로 잡아 픽션이면서도 논픽션 같은 현실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시각과 달리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정치음모와 대조적으로 조명해 참신했다.
이같이 미니시리즈 형식이 시청자들로부터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절제된 형식과 다양한 소재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니 시리즈는 일정한 방송시간과 횟수에 맞춰 제작되고 또 이미 완결된 작품을 극화하기 때문에 긴밀한 구성을 견지할 수 있다.
방송시간에 밀러 급하게 쓰여진 대본을 가지고 장기방송에 따른 시청률을 의식해 수시로 내용이 뒤바뀌고 방송 횟수도 일정하지 않은 연속극의 무계획성을 극복할 수 있는 형식이 미니시리즈인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다양한 소재의 선택도 무시할 수 없는 미니시리즈 형식의 장점이다.
도시근교 농촌의 주변적 삶(왕룽 일가), 정치권력과 손잡은 폭력세계(무풍지대), 지금까지 소외돼 왔던 여성의 목소리로 꾸며진 사회문제(절반의 실패), 권부의 음모(제5열·거인), 의사들의 사랑과 고뇌(천사의 선택)등등.
삼각관계로 정형화된 멜러물과 억지로 행복한 삶을 강요하는 비현실적인 명랑 홈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소재들이다.
결국 미니시리즈 형식은 장기 기획이 되지 않고 소재가 빈곤한 기존 드라마들의 한계를 지적해주고 있다.<오병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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