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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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음에 열리는 창문을 수줍은 계절은 닫아 버리고 바쁘게 접힌 햇살은 꾸역꾸역 답답한 굴뚝 속으로 빠져나간다. 아직은 덜 내린 눈이 조기비늘처럼 날리는데 노란 금줄엔 빨간 꿈이 열리고 앙상한 목련나무 가지 위로 한 마리 까치가 연하장을 떨군다.> (서은숙의 시『연하장』)
시인의 집에 까치가 떨구고 간 연하장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두꺼운 종이에 금박까지 두른 그런 연하장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인사말은 물론 보내는 사람의 이름까지 모두 인쇄 된 그런 연하장도 아닐 것이다.
까치가 떨구고 간 연하장은 아마도 또박또박 육필로 쓴 정겨운 사연과 함께 손수 그린 예쁜 그림이 곁들여진 그런 연하장일게 틀림없다.
연하장은 화려하다고 좋은 게 아니다. 값이 비싸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조촐하지만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야 좋은 연하장이다.
그런데 요즘 직장이나 집으로 날아드는 연하장에는 마음을 담은 연하장이 드물다. 마음은커녕 생판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의례적인 인사말 몇 마디 끝에 자기 PR만 잔뜩 늘어놓은 「사이비연하장」이 많이 나돈다. 그런 연하장일수록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필서명처럼 쓴 이름도 육필이 아닌 인쇄다.
또 어떤 사람의 연하장은 같은게 집으로도 오고 직장으로도 날아온다.
체온이 없는 연하장은 백화점에서 보내오는 상품 캐털로그나 마찬가지다.
올해엔 크리스마스카드를 포함한 연말연시의 연하장시장규모가 3백억원을 웃돈다고 한다. 우편물로는 어림잡아 2억 통이 넘는 숫자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신문을 보면 지방자치제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전국에 갑자기지자제바람이 불어 정치지망생들의 연하장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창회, 송년회 등 각종 모임이 작년보다 30%나 늘어났고 연하우편물은 50%나 늘어났다고 한다.
정체불명의 연하장들은 희망의 새해가 아니라 또 한바탕 불어닥칠 시끄러운 정치판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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