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약까지 써야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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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주식을 무제한 매입, 증시주가를 끌어올리겠다는 당국의 발표에 접하면서 우리는 정부의 경제 시책이 방향감각이나 균형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물론 자본 시장이 건전하고 튼튼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증시가 서민들이 한푼두푼 저축한 돈까지 산업자금으로 돌리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할뿐 아니라 주식투자를 통해 일반 국민들이 기업의 이윤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금년 한해만 해도 12조원이라는 자금이 증시를 통해 기업에 조달됐고 3백만명 이상이 증시를 통해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욱이 은행 등 간접금융 시장이 산업조달 창구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직접금융, 특히 주식시장은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앞으로 2년 후에는 자본시장을 개방해야할 시점에 있기도 하다.
그런 만큼 증시의 건전한 육성은 우리 정부나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그것이 어느 특정부문에 대한 것이라도 전체 경제운용의 방향과 궤도를 일탈해서는 안되며 다른 부문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그 우선순위가 고려되고 균형이 유지돼야 한다.
잘 알다시피 지금 우리경제는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로 침몰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당면 위기극복이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다. 증시침체와 주가의 하락도 그 근원은 수출부진, 기업의 투자의욕 감퇴, 성장둔화 등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경제의 전반적 침체국면, 그리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경제의 장래에 대해 일반 국민이나 주식 투자자들이 지속적 성장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그 시점부터 증시는 정부의 특별한 부양책 없이도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될 것이 확실하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증시침체의 근본원인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번 중앙은행의 발권력까지 동원 해가며 증시를 부양하겠다고 나선 것은 심장의 병을 놓아둔 채 부스럼만 치료하겠다고 서두르는 인상이 짙다. 더욱이 그 내용이 정부가 동원 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거의 총동원한 느낌이어서 과연 이래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같은 조치로 한때 주가가 오른다해도 우리경제의 근본 기조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경우 다시 하락할 것인데 정부가 언제까지 주식 매입자금이나 공급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지금이 과연 총력을 기울여 주가나 끌어올릴 시점인가 하는 우선순위판단의 문제다.
두말할 것 없이 주식투자는 기업의 성쇠에 따라 득실이 결정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기업이 활력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주가가 오른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주식시장이 그토록 걱정이 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비상수단을 쓰기 전에 불필요하거나 지나친 규제조치를 단계적으로 풀어 정상을 유지토록 하는 것이 정도였을 것이다.
정부는 최근 고급 공무원의 봉급동결 등 경제 난국 타개를 위해 시범을 보이겠다고 나섰고, 이에 호응한 일부 기업에서도 관리직의 봉급을 동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자제하는 분위기가 싹틀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시점에서 같은 정부가 누가 뭐라 해도 여유자금이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머리게임을 위해 무제한 돈을 풀겠다니 도대체 이 나라 경제를 어느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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