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타도 일본"숙원 푼 「700일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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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이틀 앞둔 86년9월18일 오전 8시, 선수촌내 VIP라운지엔 왠지 모를 긴장감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사와 일본 교도(공동) 통신사가 합동으로 마련한 한·일 선수단장 간의 대담이 시종 무거운 침묵 속에 장외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추절을 맞아 새벽 일찍 합동 다례제를 치른 터라 꽤나 상기된 표정의 김집 한국선수단장과 칠순 노구를 이끌고 자리한 안자이 미노루(안제실) 일본선수단장.
가벼운 인사말이 오간 후 자연스레 화제는 아시안 게임에 임하는 양국의 메달 전망 쪽으로 모아졌다.
안자이 단장 『일본은 현재 70개 안팎의 금메달을 겨냥하고 있습니다만 한국과의 메달 경쟁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김집 단장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포츠 강국인 일본에 한국이 맞상대하기엔 아직은 역불급이 아닐까 싶은데요….』
곁으로는 연신 겸양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는 김집 한국선수단장은 그러나 표정에는 「타도 일본」의 당찬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그로부터 꼭 12일 후인 9월30일 안자이 일본단장의 우려는 현실로 맞아 떨어졌다. 전날까지 금 42-35로 뒤지던 한국이 양궁에서 금9개를 따냄으로써 전세가 역전, 한국이 앞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메달레이스에서 한국이 47-46 1개 차로 추월한 이날은 공교롭게도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서울올림픽유치에 성공한 바덴바덴 승리의 5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비단 몇몇 개인종목을 제외하고는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등 굵직한 종합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섰던 적이 없었던 터라 감격은 더욱 컸다. 이날 밤 이 소식을 전하는 TV 캐스터의 목소리도 유난스레 떨리고 있었다.
이젠 체육장관이 된 김단장의 회고. 『당초 선수단 목표는 금65개였지만 제 생각은 좀 달랐어요. 금77개를 따내 일본(64개)을 13개 차로 앞설 수 있다고 확신했었거든요. 그리고 제 계산으로는 일본을 앞지를 수 있는 날을 10월3일로 잡았으나 예상보다 빨리 다가온 셈이지요.』
하루 뒤인 10월1일 일본은 설욕을 노렸으나 굴욕을 당하고 만다. 유도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는 일본 유도가 한국에 거푸 발목이 잡혔던 것. 한국은 김재엽(60kg급) 이경근(65kg급)이 금2개를 추가, 모두 금57개로 일본(52개)을 5개 차로 앞서 우위를 지켰다.
10월2일 일본은 또 다시 치욕의 날을 맞는다. 한국은 태권도·승마·테니스 등에서 금6개를 보태 금63개로 노메달에 그친 일본과 11개 차로 간격을 벌렸다. 개천절인 10월3일 한국은 유도95kg급의 하형주 등 2명이 금메달을 따낸 반면 일본은 연 이틀 동안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특히 믿었던 유도에서의 몰락은 충격적이었다.
이날 현재 한국은 금73개로 일본을 21개 차로 앞서 더 이상 일본은 한국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과의 종합 우승 다툼. 중국과는 불과 금12개 차였다. 종반 각축 속에 한국은 맹추격했으나 폐막을 하루 앞둔 4일 사실상 금3개 차로 앞선 중국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한국은 최종일인 10월5일 축구우승으로 대미를 장식했으나 금메달 93개를 마크함으로써 금94개의 중국에 결국 1개가 뒤져 아깝게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금·은·동을 집계한 총 메달 수에서는 2백24개(은55·동76)-2백22개(은82·동46)로 우승한 중국보다 2개가 더 많았다.
일본은 금58개(은76·동77)로 한국에 금35개가 뒤진 채 3위로 밀려났다. 당초 기대했던 유도(금2) 레슬링(금5) 수영(금17) 요트에서의 부진이 일본의 3위 전락을 초래한 주된 요인이었다.
이를두고 일본 언론들은 「적을 알지 못한 방심의 탓」으로 일본 체육계를 질타하고 나섰다.
마이니치신문은 「서울참패…그리고 스포츠 새 사정」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했는가하면 요미우리신문은 「세계 속에 한국을 어필」 제목의 좌담회를 통해 일본이 한국에 대패, 종합 3위로 밀려난 데 대한 충격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제는 일본 스포츠가 한국을 배워야할 것』이라며 무사 안일했던 일본스포츠계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마이니치신문의 야마모토(산본속일) 기자가 타전한 「아시안게임 3위 전락의 일본」 기사는 당시 일본선수단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선수단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들지 않았다. 모두들 믿어지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일본이 질 수밖에 없는 대회였다. 일본은 25개 경기 종목에 모두 참가했지만 금을 딴 것은 11개 종목뿐이었다.
반면 중국은 21개 종목에 출전, 15개 종목에 걸쳐 금94개를 따냈고 한국은 3개 종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종목에서 고르게 메달을 따냄으로써 일본을 압도했다. 그만큼 경기단체마다 메달에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LA올림픽 직후부터 7백일간의 강훈을 실시했으며 이를 위해 무려 40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또 스포츠과학연구소를 본격가동, 과학적인 지도를 꾀했고 해외전지훈련 등 선진기술 습득에 박차를 가했으며 동시에 각종 포상금 제도의 도입이 경기력 향상에 탁효를 발휘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전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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