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 다룬 출판물 많이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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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점가와 문단에 무정부주의(아나키즘) 바람이 불고 있다.
금년 들어 아나키즘에 관계된 서적만 해도 『아나키즘』(조지 우드콕),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 (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폴 애브리치), 『반역아 미하일 바쿠닌』(EH카) 등 4권이 번역, 출간됐다.
아나키즘의 진행과 종말, 러시아 혁명기에 있어서의 아나키스트들의 기여와 패배, 한 아나키스트의 삶과 사상 등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들은 물론 작년의 출판 자유화 조치 이후 봇물 터지듯 출현한 사회주의 사상서의 온전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키즘 역시 산업혁명 이후의 급속한 경제적 집중화와 자본주의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어서 사회주의의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그 소개가 불가피하다 할 수 있다.
출판 못지 않게 문단에서도 아나키즘의 대두가 눈에 뛴다. 『문학정신』 10월호에 실린 젊은 문인들과의 대담에서 작가 이문열씨는 스스로 아나키즘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참다운 정치권력을 이루려다 허망히 끝나버리는 내용의 그의 작품 『영웅시대』나 『황제를 위하여』에도 아나키즘적 단서가 농후하다고 시인했다.
이 대담에서 이씨는 『내가 북한에 대해 반공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권력에 대한 혐오이며 현재 잘못을 자행하고 있는 권력뿐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나온 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혐오와 전율을 느낀다』고 말했다.
첫 시집 『얼음시집』에서 타의적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이 세계를 죽음과 폐허 분위기로 묘사했던 송재학씨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프루동·크로폿킨·바쿠닌 등 아나키스트들을 소재로한 연작시를 발표하며 계속 아나키즘에 빠져들고 있다.
기존 소설양식을 파괴하는 실험소설을 써오던 작가 최수철씨도 중편연작소설 『무정부주의자』 3부를 구상, 『문학사상』 11월호에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짧은 나날들」을 끝으로 1부3편을 끝냈다.
최씨는 작가의 말에서 『어느 무정부주의자라는 인물을 통해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바는 탈중심적·무체계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소설가나 시인은 개인의 절대자유를 위해 권력·중심·세상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아나키스트적 요소는 현실보다는 상상, 나아가 공상에 기대고 있는 예술가들의 본질적 기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쪽도 저 쪽도 아니다」는 식은 역사적 허무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우리 문학 최초의 아나키스트는 남도 북도 거부,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자살하고 마는 최인훈씨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라고 밝히고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 허무주의로 인해 이와 같은 자살이라는 패배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며 아나키즘을 경계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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