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선거 공약 핑계로 퇴임 후 영향력 지속 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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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오른쪽에서 둘째)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위해 들어가고 있다. [사진연구가 정성길씨 제공=연합뉴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이자 한국의 광복절인 15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그럴 경우 현직 총리의 8.15 참배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21년 만이 된다.

8월 15일은 아니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취임 후 매년 한 차례 야스쿠니를 찾아 참배했다. 그럴 때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전쟁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행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올해는 특히 히로히토 전 일왕이 A급 전범 합사(合祀)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공개됨으로써 일본 내 반대 여론도 크게 높아졌다. 그럼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집착하고 있다.

2001년 2월 9일, 당시 고이즈미 의원은 가고시마현 지란에 있는 '특공대원 평화회관'을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이른바 '가미카제'란 이름의 자살 폭격을 감행한 특공대원이 출격에 앞서 남긴 유서와 일기장 등을 전시한 곳이다. 일본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던 그는 이곳을 둘러본 뒤 "총리가 되면 반드시 8월 15일에 참배하겠다"고 공언했다. 9월 퇴임을 앞둔 그는 이번이 공약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참배 이유를 밝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에 머리를 숙이는 건 의당 해야 할 일"이라며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참배하는 것"이라고 강변해 왔다. "참배는 마음의 문제일 뿐 정치.외교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말도 되풀이했다.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야스쿠니 참배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자신도 늘 이런 측면을 의식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2001년 총재 선거 때 고이즈미 진영은 8.15 참배 공약을 담은 유인물을 일본유족회 각 지부에 팩스로 보냈다. 유족회는 2차 세계대전 전몰자의 미망인과 직계 가족이 가입한 단체로, 150만여 회원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각종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특히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숙원 사업으로 내걸고 있다. 고이즈미에게 참배 문제는 유족회를 포함한 보수세력의 표를 결집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였다.

올해 5월 한 경제단체 대표가 그의 참배 중단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거대 시장인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발언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업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이해하지 못 한다"며 일축했다. 그의 참배가 '마음'이 아닌 '정치' 문제임을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한.중과의 외교전에 야스쿠니 문제를 이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임기 중 이웃 나라들의 참배 중단 요구를 내정 간섭으로 몰아붙이면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 같은 태도는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는 추세와 맞아떨어졌고, 일본 국민에게는 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지도자란 이미지를 심어 줬다. 그러는 동안 야스쿠니 논란의 핵심인 역사인식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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