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당직자회의서 왜 화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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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이 6일 청와대 당직자회의에서 5공 청산문제에 대해『모든 것을 걸고 최 단시일 안에 이 문제를 종결시킬 수 있는 방안을 내놓으라』고 다그치자 여야모두 그 진의를 궁금해하며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민정당간부들은 침통하고 비장한 표정이지만 정호용 의원 세력이나 백담사 측은 여전히 냉담하고 야당은 오히려 강경해지는 낌새를 보이고있다.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지시가 여야에 대한 최후통첩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으며 지시대로 안될 가능성이 많아 그 이후 나올 노 대통령의 중대결단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청와대회의에 참석했던 당직자들은 『노 대통령이 오늘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며 『대통령이 말하는 30여분 동안 어느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회의 분위기를 설명.
노 대통령은 서두에 유럽방문소감을 얘기하며 『이제 우리도 우물안 개구리 식의 서로 헐뜯고 반목하는 풍토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향해 활발히 뛰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뒤 30여분간 국내문제를 놓고 목소리를 높여 질책 겸 지시를 했다.
노 대통령은 『광주관계보상법은 어떻게 됐느냐』『예산은 어떻게 할거냐』 『토지공개념 법은 언제 처리할 것이냐』고 당면한 현안을 일일이 지적하며 『이런 식으로 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여든 야든, 국민들한테 죄를 짓고 있다는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호통.
노 대통령은 5공 청산문제에 들어가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코피를 흘려가며 순방외교를 했는데 돌아오면서 국내문제를 생각하니 비행기에서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불편한 심기를 본격적으로 토로.
노 대통령은 『출국 전에 소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도록 당부했었는데 지금 이게 무어냐』고 언성을 높이고 『당직을 맡았으면 그에 따른 책임이 있는 법인데 그렇지 못했다면 당직을 내놔야하고, 더 이상 당직이나 국회의원직에 연연하지 말라』며 당직자들 옷깃에 단 의원배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 대통령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2,3차례 반복한 뒤 『모든 것을 걸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5∼6일 안에 여야 합의안을 내놓아라』고 다그쳤다.
노 대통령은 정 의원사퇴를 반대하는 서명운동 대목에 이르자 『뭐, 서명을 해?』라고 호통을 친 뒤 이러한 행동을 「싸움 박질」이라는 표현을 써가며『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노 대통령은 서명의원들이 박철언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이를 일부 당직자가 보고한 대목을 의식해서인지 『모두 다 당의 오른팔과 왼팔들인데 오른팔이 왼팔을 자르라고 비방한데서야 말이 되느냐』고 격앙.
노 대통령은 『중집위를 열어 오늘 내가한 말을 그대로 전달하라』며 『당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태도이며 건전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좋으나 테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마치 숙당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핵심당직자들은 시종일관 『죄송하다』며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박 대표가 『죄송하다. 뜻을 받들어 열심히 모시겠다』는 말만하고 돌아 왔다는 후문.
그러나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정호용씨 측 의원들은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당론을 지키자는 우리의 주장을 해당행위로 보고한 모양이구먼』이라고 분석.
노 대통령의 6일 당직자회의 지시를 5공 청산의 일방종결을 위한 징검다리라고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노 대통령도 『모든 걸 걸고하면 안되는게 어디 있느냐』고 말했고 한 여권핵심인사도『당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적극적으로 달려들면 할 수 있다』고 했으나 지금까지 안되던 일이 5,6일 내에 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일방종결을 위한 마지막 명분축적의 인상이 짙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아직 구체적 복안은 밝히지 않았으나 결국 당 지도부가 합의 안을 가져오지 못할 경우 나름의 5공 청산 종결수순을 밟지 않겠느냐고 보고있다. 우선 정 의원 지지 서명의원들을 가지치기 식으로 차단하여 정 의원을 항명차원에서 출당 등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이날 대통령의 항명에 대한 경고 톤으로 봐서 능히 짐작할 만 하다.
이와 동시에 제도정치권에 돌개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는 전두환씨의 증언은 석명서로 대체, 일정수준의 국민기대를 충족시킨 뒤 광주피해자에게는「푸짐한」물질적 보상을 담은 광주보상법이란 선물로 대응하고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 일방종결을 선언하려는 의도가 아닌가하는 생각들이다.
이와 함께 기존당직자들을 문책, 경질해 분위기를 일신하는 한편 지자제 법을 조기에 통과시켜 내년 초부터 선거분위기를 조성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노 대통령이 『의원직에 연연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은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종결되지 않을 경우 민정당의원 총사퇴→정계개편→조기총선이란 비상수단을 배수의 진으로 치고 있는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야당도 그 영향권 밖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려는 대야용의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정 의원 퇴진반대에 서명한 30여명의 의원들을 정 의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6공 출범이후 끊임없이 제살 갈라 먹기 식으로 쪼개놓은 범 여권내의 깊어 가는 불만을 무마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 정 의원 측은 「친·인척」의 발호를 문제삼고 나올 기세여서 새 당직개편 등과 관련, 여권 내 불평세력은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릴 가능성이 있어 내년정국에 혼란을 더할지도 모른다. <김현일·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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