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금리 해제 한 달 … 일본 '장농 머니'가 움직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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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 엔 던(done.거래 성립)."

지난달 28일 오전 일본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의 '도쿄 단자(短資)' 건물 9층에 있는 딜링룸(사진). 제일 앞줄의 브로커 다구치 히로시(田口宏) 차장의 외침에 딜링룸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어 수화기를 한 손에 쥔 브로커들이 잇따라 자신의 고객(기관)이 추가로 낸 주문을 외쳐댔다. 뒷자리 브로커들은 망원경에 눈을 대고 주문 현황이 적힌 칠판을 뚫어져라 주시한다. 그리곤 재빨리 수화기를 잡고 고객에게 의향을 타진한다. 눈코 뜰 새가 없다.

일본은행이 지난달 14일 제로금리 정책을 해제한 뒤 한 달. 금융회사 간 단기자금 거래를 중개하는 이곳 도쿄 단자 딜링룸의 상황은 180도 변했다. 한 달 전만 해도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요즘은 오전 8시30분 문을 열자마자 주문 전화가 빗발친다. 점심식사도 도시락으로 해결할 정도다. 제로금리가 5년 만에 끝나 시장이 정상을 되찾으면서 벌어진 풍경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거의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었던 시절이 끝나면서 금융회사마다 보다 좋은 금리조건으로 돈을 빌리고, 또 빌려 주려는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요즘 가장 많이 거래되는 것은 당일 빌려 다음 날 돌려주는 '무담보 콜 익일물'.

경력 14년의 다구치 차장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하루에 주문 전화 10통가량 받던 것이 이제 많게는 100건 정도를 처리한다"며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에미 요시노부(江見吉信) 총무부장은 "제로금리 해제 이후 업무가 몇 배로 늘었다"며 활짝 웃었다. 제로금리 시절 콜시장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장금리는 연 0.001%까지 떨어져 표준 거래금액 단위인 100억 엔을 시장에서 돌려봐야 하루 270엔의 이자, 즉 담배 한 갑어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 전국에 6곳 있던 단자사는 3곳으로 줄었다.

제로금리 해제는 일본 최대의 금융회사인 우정공사도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시중은행들이 속속 보통예금 금리를 올리자 우정공사에 "우체국도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돈을 빼 시중은행으로 옮기겠다"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은 우정공사는 부랴부랴 금리를 올렸다. 6년 만이다.

은행 간 금리 경쟁도 본격화했다. 지난달 중순 미쓰비시도쿄UFJ.미즈호 은행 등이 6년 만에 예금금리를 0.001%에서 0.1%로 올렸다. 무려 100배나 뛴 것이다. 일본 3대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三井住友)은행은 한 발 더 나아가 0.2%로 전격 인상했다. 곧바로 고객의 돈이 몰려 신규계좌 개설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나 늘었다.

증권.보험회사도 비슷하다. 금리가 높은 단기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머니마켓펀드(MMF)를 2002년 아예 폐지했던 닛코(日興)에셋매니지먼트는 지난달 이 상품을 다시 팔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120억 엔이 몰렸다.

버블 시절 이율이 6%로, 개인들의 주요 재테크 상품이었던 '양로 보험'에도 돈이 다시 몰리고 있다. 다이이치(第一)생명보험이 최근 예정이율을 연 1.3%에서 1.5%로 올리자 지난해 동기 대비 4배에 가까운 600억 엔의 자금이 들어왔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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