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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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제 국민들은 「5공청산」이란 말놀음에 지칠대로 지쳤다. 정치는 5공청산이 전부인양 1년이 넘도록 원점에서 맴돌고 그동안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다. 이제 단안을 내릴때가 왔다. 「가능성의 예술」로서의 정치의 참 모습을 누군가가 나서서 보여주지 않으면 파국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충만해 있다.
과연 이 정치권은 5공을 청산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90년대도 이제 한달이 채 안남았고 우리 안팎에 할 일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어제도 오늘도 진전없는 5공청산 타령만 하고 있는채 이 한해도 그냥 떠내려 보내고 있다.
야권 3김씨가 금년내 청산 완결을 다짐하고 민정당이 대통령 부재중 돌파구를 열겠다고 나섰을 때만해도 우리는 뭔가 일이 되는가 하고 한가닥 기대를 가졌었지만 대통령 귀국이 코앞에 다가온 현재까지도 일이 되기는 커녕 더 꼬이고 헝클어졌을 뿐이다. 이제 와 여야가하는 일이라고는 노대통령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일 뿐이다.
그동안 5공청산을 한다고 중진회담이니 막후협상이니 하고 부산스런 움직임을 보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고 그통에 애꿎은 예산만 연계투쟁전술에 걸려 법정시한을 못지키고 심의마저 소홀히 됨으로써 국정에 지장만 가져봤다.
이처럼 지금까지 정치권의 5공청산작업은 빗나가기만 하다보니 누가 누구를 손본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이제 5공청산을 더이상 이런 정치권의 협상에 맡기기는 어렵게 됐다. 더이상 시간도 없을뿐더러 이 문제를 반드시 금년안에 끝내기 위해서라도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수 밖에 없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집권당 총재로서 노대통령은 싫든 좋든 단안을 회피할 입장이 아니다.
우리는 노대통령이 귀국후 빠른기간안에 그동안의 5공청산 실적을나름대로 평가한 후 이 문제에 관한 대통령의 솔직한 견해를 먼저 국민에게 직접 밝혀주기를 바란다.
노대통령이 보기로는 청산된 것이 무엇이며, 미진한 것은 무엇인지,그리고 앞으로 5공청산과 관련해 더 조치할 일은 어떤 것이며 야당요구중 받아들일 부분과 거부할 부분은 어떤것인지 모두 명쾌하고 솔직하게 국민에게 직접 밝히는 것이 좋겠다.
그 다음 5공청산에 관한 대통령의 이런 종합적인 견해를 갖고 마지막으로 야당총재들과 한번 절충하기를 권하고 싶다. 만약 이 마지막 절충마저 안되고 대통령의 견해와 야당 주장간에 거리가 있다면 그때는 국민에게 직접 물어본다는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 중간평가를 선거공약으로도 내건만큼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진퇴까지도 건다는 비장한 각오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5공청산방안에 관한 노대통령의 견해속에는 당연히 제도개혁에 관한 방안도 포함돼야 할 것이다. 지자제를 위시한 경찰중립화·보안법등 중요한 제도개혁이 그동안 정치권의 당략적 저울질로 어느 세월에나 실현될지 의심스런 실정이다. 노대통령은 대야절충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민주화의 진전을 위해 이런 제도개혁의 확고한 추진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민이 믿을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기회에 민정당의 반성을 촉구하고자 한다. 그동안 5공청산을 둘러싸고 빚어진 민정당 내부의 사정은 정말 한심스러웠다.
대야협상에 임하는 원칙과 기준이 뭣인지도 모호했고 안의 소리와 밖의 소리가 달랐는가 하면 5공청산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다툼으로 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대권주자니,후계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누가 어떤 배경에서 후계자나 대권주자로 거명되는건지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지만 이런 시점, 이런 상황에서 그것은 한마디로 철없는 일이라고나 할까. 구심점이 없고 분수를 모르는 민정당이라면 정비와 수술이 불가피할 것이다.
5공청산에 임하는 야당들의 자세에도 문제는 많았다고 본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대로 여야협상이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자제해 왔지만 야당이 진지하고 성의있게 5공청산에 나섰다고는 보기 어렵다.
야당이 역점을 두어 추진했어야 할 일은 권위주의요소의 제거와 민주화개혁의 실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야당은 특정인의 공직사퇴라는 외곬 주장에만 매달려 실제로 민주화의 진전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한것이 없었다.
우리는 특정인을 옹호할 생각도없고 그들이 5공문제에 책임이 없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3김씨가 둘러앉아 넣고 빼고 하다가 점찍은 소위 5공핵심인사의 기준이 뭣인지도 애당초 모호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신분에 관계된 일을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사리에 온당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리하여 이제와 특정인이 사퇴하면 5공이청산되고, 사퇴하지 않으면 5공이 청산되지 않는 것으로 논리를 몰고온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특정인이 사퇴하면 5공청산이 끝난 것으로 보고 더이상 문제를 삼지않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악법도 고치고 지자제도 실시해야지 어떻게 그것으로 끝날일인가. 특정인 사퇴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법도 안고치고 예산도 붙들고 있다는 것은 누구를 위해, 무엇때문에 5공청산을 하자는 것인지 알수 없게 된다.
우리는 야당들도 이제는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 민주화와 민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광주희생의 거룩한 정신을 국민적 민주의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시야를 넓히기를 권고하고 싶다. 국민도 그것을 원한다고 본다.
요컨대 여든 야든 이제는 5공청산문제의 착난에서 깨어나야 한다. 더 이상 이 해괴한 논리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고만 있을수는 없는 일이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노대통령은 귀국하는대로 국민투표와 진퇴까지도 각오하고 청산완결에 나서야 하며, 야당들도 진정한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 한차원높은 자세로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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