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비자주'로 이루는 자주국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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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특차(特車.도쿠샤)라는 일본말이 있다. 대학에 특별 전형으로 들어가는 특차(特次)도 아니고 소방차.제설차 같은 특장차(特裝車)를 일컫는 말도 아니다. 전차(탱크)를 뜻하는 단어다.

일본에서 방위청과 육.해.공 자위대는 1954년 7월 1일 공식 출범했다. 미.일 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결(54년 3월 8일) 직후의 일이다. 군대를 두지 않고 교전권(交戰權)도 인정하지 않는 평화헌법에 따라 '순전히 방위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그래서 명칭도 자위군 아닌 자위대로 정했다.

태평양전쟁의 악몽 때문에 '군(軍)'이나 '전(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국내외 여론을 의식해 억지로 만든 용어가 바로 '특차'다. 초기의 자위대는 부대 단위인 '사단'도 '관구대'로 바꾸어 불렀다. 특차와 관구대는 61년에 '전차' '사단'이라는 원래 명칭을 되찾았다. 그러나 자위대에는 다른 기묘한 용어들이 남아 있다. 보병부대는 실업계 고등학교의 반 명칭을 연상케 하는 '보통과'로 불린다. 포병부대는 '특과(特科)'이고 자위대 장교는 마치 민간 회사원처럼 '간부'로 통칭된다. 어뢰로 적함을 공격하는 구축함에는 '호위함'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붙었다. 항공자위대의 공격기는 '지원전투기'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데, 왜 이렇게 좀스럽고 궁색하고 비(非)자주적으로 보이는 말장난을 할까. 유엔 평화유지군(PKF)의 일본어 번역을 두고도 '평화유지군'과 '평화유지대' 사이에서 호들갑 떠는 나라가 일본이다. 단순히 위헌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조심성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덜 받으면서 조용히 군사력을 키우려는 안간힘이다.

자위대는 공중급유기를 오랫동안 탐내 왔다. 전투기의 행동반경을 확 늘려주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공중급유기가 있으면 자위대 전투기가 한반도로 훌쩍 건너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어에만 전념한다(전수방위)는 원칙에 어긋나는 장비라는 지적이 많았다. 98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공중급유기 보유론이 힘을 얻었다. "예산을 주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데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한반도 평화 무드가 공중급유기 도입에 장애물로 등장했다. 자위대의 예산 담당자가 꾀를 냈다. '용어 바꿔치기' 특기를 발휘한 것이다. '공중급유기'를 '공중급유.수송기'로 바꾸어 놓고 "항속거리(약 6500㎞)가 기니까 해외의 재난지역 구조활동에 수송기로 쓸 수 있다"고 둘러댔다. 기체 대부분이 연료탱크인 공중급유기를 수송기로 쓴다는 설명은 누가 봐도 어색했지만 자위대는 결국 관련 예산을 따냈다(아사히신문 2001년 2월 7일자 석간). 일본은 내년 3월 1호기를 시작으로 모두 네 대의 공중급유기를 실전 배치한다. 한국군에는 단 한 대도 없다.

며칠간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통에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은 초등학생조차 입에 올릴 정도로 국민적 시사용어가 됐다. 전직 국방부 장관들과 현직 장관이 대판 붙는가 했더니 대통령이 나서서 "작전통제권은 자주국방의 핵심이고 자주국방은 주권국가의 꽃"이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꽃보다 중요한 건 열매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자주를 뒷감당할 능력이 있는지인데, 목소리들이 하도 커서 뭐가 뭔지 헷갈린다.

일본은 미.일동맹에 기대고 북한이 미사일 쏠 때마다 젓가락 하나씩 얹어서, 얼핏 보기에는 철저히 외부환경 의존적이고 비자주적인 방법으로 군사력을 키워 왔다. 비자주가 차곡차곡 쌓여 달성되는 자주국방이다. 우리는 지금 고함 지르며 머리 끄덩이 싸움이 한창이다. 중국조차 도광양회(韜光養晦.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의 자세로 국력을 키우는데 한국에선 "미국 하자는 대로 '예, 예'하길 바라느냐"고 일갈한다. 속된 말로 '뻥'이 너무 세다. '특차'란 억지 조어에 담긴 무수한 번민을 우리도 한번쯤 헤아려 보자.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