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넘은 첫 거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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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태우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과 23일의 의회 연설은 6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력적으로 추진해온 우리의 북방외교가 거둔 성공의 심도를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우선 상징성과 그 상징성이 잉태하고 있는 거대한 가능성에서 찾고 싶다. 40년 동안 세계를 양분해온 철의 장막이 헝가리를 비롯한 동구 곳곳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역사적 변환시대에 지금까지 냉전구도의 한 모퉁이에 밀려있던 한국의 대통령이 이념의 벽을 넘어 공존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은 우리 가교의 도약임에 틀림없다. .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이 지금까지 제약 당해온 서방 일변도의 옹색한 외교의 활동무대를 공산세계 전반으로 넓히고 전방위 외교의 고지를 접 할 수 있는 원대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 가능성이 현실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물론 여러 갈래의 변수가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지금 동구를 휩쓸고 있는 변혁과 민주화의 바람이 순조롭게 원래의 방향으로 정착되고, 이 개혁에 원동력을 제공한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좌절되지 않아야 한다.
이 부분은 한국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저 잘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방외교에는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서방세계와 함께 경제·정치적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그쪽 개혁세력의 기반을 강화시켜주는 일이 그것이다. 노 대통령이 의회연설에서 민간부문의 투자와 경제협력을 약속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초기단계에서부터 우리 분수를 넘는 과도한 경제원조를 약속하는 것은 북방외교의 먼 장래를 생각할 때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교란 어느 경우든 상호주의가 엄격히 지켜질 때 건전한 진로가 확보되는 것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원칙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북방회교의 본질은 동구권이란 우회로를 통해 평양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목표에 더 큰 비중을 두어왔다. 먼 시각으로 보면 그런 전략은 계속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김일성의 북경방문이나 남북적십자 회담에서 보인 북한측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와 같은 전망이 무망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루마니아·중국·북한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듯한 반 개혁 보수로선은 동구의 민주화 개혁과 아시아 공산국 사이에 뚜렷한 단절현상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중국의 주도로 언젠가는 뒤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당장은 동구를 통한 평양으로의 우회전략은 별 실효성이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 대통령이 헝가리 의회연설에서『한국과 헝가리의 관계증진이 헝가리와 북한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믿는다.
궁극적으로 남북한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고립시키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한에 잠재해 있을 온건 실용주의세력을 고무하고 이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 북방외교의 중요한 요인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이번 노 대통령의 유럽 순방과 특히 헝가리 방문이 우리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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