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교류, 협력 쌓아야 38선 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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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고-김학준<대통령 사회 담당 보좌역>】동·서독 관계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자 국제 사회와 우리 겨레의 관심은 자연히 남·북한 관계로 쏠리고 있다. 이는 독일이나 한반도 문제가 모두 전후 얄타 체제의 대표적인 냉전 산물로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한다.
오늘날 독일에서의 혁명적 사태의 출발점은 동독 국민의 자유화·민주화 투쟁이다. 동독을 사실상 지배해 온 스탈리니스트 체제에 대한 국민적인 반대 운동의 열기가 마침내 소련과 동독의 권력자들이 동·서독 국민들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를 막기 위해 세웠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고, 체제의 전면적인 민주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노도와 같은 국민적 저항에 굴복하여 동독의 지도층은 국경을 전면 개방하고 동독 국민들의 서독 여행 및 이주를 허용하는 한편, 체제를 부분적으로 개혁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되자 서독에서는 동·서독의 재통일 가능성을 논의하게 되었으며, 세계도 그러한 방향으로 분석의 시각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통독의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는 인식을 되찾게 되었다. 무엇보다 통일 독일의 예상되는 막강한 국력과 그 「횡포」가능성을 경계하는 강대국들 및 주변 국가들의 견제와 서독에의 사실상의 흡수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동독의 방어적 자세를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독일 사태는 통독의 장래를 위한 역사의 커다란 진보임에 틀림 없다. 그러한 진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들은 무엇일까.
독일의 분단은 어디까지나 강대국들이 부과한 것이지 독일 국민들 사이의「내쟁」의 산물이 아니며, 이런 뜻에서 「국제형 분단」의 전형이다.
그렇기에 양독은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고 내쟁을 겪음이 없이 단계적으로 상호 교류와 협력을 쌓아올리는 가운데 평화공존의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쪽은 서독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념과 시장 경제의 원리 아래 자유의 공간을 확대시킴과 아울러 물질 생활의 풍요와 번영을 이룩해 부 자유와 침체의 동독에 대해 커다란 자력을 발휘하는 자석이 된 서독은 특히 브란트 총리가 취임한 69년 이후 동방 정책을 통해 이를 추진해 나갔다.
그 바탕 위에서 동·서독은 국제 관계가 긴장 완화를 지향하던 때인 72년 기본 관계 조약을 맺어 상호 불가침을 다짐하는 한편 교류와 협력의 증대를 제도화할 수 있었으며, 73년에는 유엔에 동시 가입해 독일 내부에서 합의된 평화 공존을 국제화할 수 있었다.
「국제형 분단」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양 독으로서는 그러한 조처들을 통해 궁극적인 평화통일의 바탕을 착실하게 쌓아올린 것이다.
그때로부터 다시 10여년이 흐르면서 서독의 자력은 점점 커졌다. 동독에 대한 서독의 경제 원조가 더욱 많아지고 잘 사는 서독의 생활상이 동독에 보다 더 상세히 알려지면서 서독의 자장은 넓어진 것이다.
여기서 동독의 정치 지도층은 동독 사회주의의 「침윤」과 그리고 그것에 따른 서독에의 점진적 흡수의 가능성을 경계하게 되었고, 따라서 통독 문제에 대해 방어적 입장을 노골화하기에 이르렀다. 개헌을 통해 통일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체제의 「부식」을 막으려는 안간힘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 스달리니스트 혁명」의 물결이 동독에도 파급되면서, 그것은 오랫동안 서독의 발전에 자극되어 동독 안에서 축적되어 온 자유화와 민주화의 열기가 폭발하도록 촉매의 작용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분단 현실의 인정 위에서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서독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교류와 협력의 축적은 동독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재촉한 「트로이의 목마」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동·서독의 관계가 이렇게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남·북한은 불행히도 격심한 대립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해 오면서 적대감과 불신감을 키워왔다. 교류와 협력은커녕 안타깝게도 상호 인정이라는 출발점마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독일의 상황과 중대하게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국제 관계가 탈냉전의 긴장 완화 추세로 움직여도 그것을 남·북한 관계의 개선에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한 관계의 본질적인 개선과 궁극적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인정을 바탕으로 한 교류와 협력의 증대를 통해 평화적 공존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긴요하다.
교류와 협력의 축적을 통해 적대감과 불신감을 해소시키는 가운데 동질성을 회복하면서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의해 남·북한이 함께 진지하게 노력해야 하겠으나 통일 국가의 미래상을 민주 공화국으로 설정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쪽은 우리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우리 나라를 민주 복지 국가로 발전시키면서 그 자력으로써 북한의 개방을 꾸준히 유도해 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 같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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