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어명 527년 만에 '완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한약사 부자(父子)가 17년간 전국을 뒤져 한약재 사진을 직접 찍고 관련 자료를 보완해 조선시대 유명 의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아래 사진)을 새로 펴냈다. '의방유취' '동의보감'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서인 이 책에 그림이나 사진 자료가 곁들여진 것은 1433년(세종 15년)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처음이다.

주인공은 대구시 약전골목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신전휘(65.(右))씨와 한약사인 아들 용욱(34.(左))씨. 그림을 첨부한 '향약집성방' 증보판 발간사업은 조선 성종의 어명이기도 했다.

1479년(성종 10년) 승지 이경동은 임금에게 세종 당시 백성들이 국산 약초를 쉽게 찾아 이용할 수 있도록 '향약집성방'이란 책을 펴냈으나 이름만 전할 뿐 그림이 없어 일반 백성이 구하기가 어렵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성종은 그림을 곁들인 알기 쉬운 증보판 편찬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후 어떤 사료에도 성종의 지시가 실현됐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결국 신씨 부자의 이번 책 발간은 527년 만에 성종의 어명을 완수하는 결과가 된 셈이다.

대구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을 역임한 신전휘씨는 "1990년 한약박물관에 소장할 사료를 수집하던 중 향약집성방이 유명 의서인데도 후속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책에 실린 약초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 책에 나오는 약초 360여 종에 대한 사진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산간 오지는 물론이고 제주도 10여 차례, 울릉도 4차례 등 전국의 섬 지역까지 샅샅이 누볐다. 책에는 나오지만 국내에서 찾을 수 없는 약재류를 찾아 중국까지 갔다. 수십차례 중국을 찾으면서 백두산에도 5번이나 올랐다.

22일 경희대서 한약학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인 아들 용욱씨도 2001년부터 이 작업에 본격 합류했다.

그는 "한약재를 공부하다가 이 책이 동의보감의 밑바탕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던 일이 결국 내 일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들 부자는 누구든지 어느 때나 약초를 식별할 수 있도록 약초 한 종류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진을 4장씩 실었다.

같은 약초라도 계절마다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뿌리와 가공된 약재 사진도 곁들였다. 책에 실린 사진만 모두 1800여 장.

"처음 듣는 약초 이름이 너무 많았습니다. 백본은 현재는 황기라고 하는 식입니다. 500년이 지나면서 이름이 변해서 고증에 많은 시간이 들었죠."

이번에 펴낸 '향약집성방 향약본초'(계명대 출판부)엔 원본보다 20여종이 많은 380여 종의 약재류가 소개됐다. 늘어난 20여 종은 창포 하나가 창포와 백창포로 갈라지듯 그동안 약초가 분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씨 부자는 이번 증보판을 영문으로도 펴낼 계획이란다.

대한한약협회 이개석 회장은 "한약재를 뿌리까지 사진으로 소개하고, 약 이름의 변천사까지 알기 쉽게 정리한 이 책은 한의학계와 한약업계 모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송의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