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순 잘못 밟은 금리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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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고 끝에 묘수 없다고 11·14 금리인하 조치가 바로 그렇다.
자못 회심의 한 수를 두듯 미리 예고부터 해서 잔뜩 여러 사람의 기대와 걱정을 함께 끌어 모은 끝에 둔 정부의 금리인하 수를 지켜본 금융계와 업계 「프로」들의 관전 평은 이렇다.
『6·29 선언을 해놓더니 다시 체육관에서 선거 치르기냐.』
『바람만 잔뜩 잡아놓고…도대체 왜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입이 건 사람들의 험담이라고만 들어 넘길 일이 못되는 것이, 실리 계산에 밝은 업계가 별로 반기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공연히 금융 자율화라는 귀중한 원칙만 깨뜨려 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험담만 늘어놓을 때가 아니라 그런 수가 나오게 된 원인을 곰곰 따져볼 때다.
금리가 내려가도록 하는 일은 그간하기 싫어서 안 해온 것이 아니다.
우선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일단 돈 값을 시장기능에 맡겨놓고 금융시장의 기능에 자생력이 생긴 뒤 인플레 기대심리가 잠재워지고 나서 비로소 시중 자금의 수급을 맞춰가며 금리가 스스로 내려가도록 할 수 있는 수순을 기다려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금리 자율화조치 시행 이후 1년을 채 못 기다리고, 전년 동월비 총통화증가율에 집착하는 통화의 난폭 운전이나 경제위기의 본질에 대한 범 정부차원의 대 국민 설득부족 등의 잘못이 계속되더니 여론에 밀러 분위기를 잡는다고 덜커덕 물리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해버리는 통에「1%는 부족하니 2%이상 내려라」는 해괴한 (?) 요구들이 각계에서 범람하게 됐다.
도대체 명색이 금리 자율화시대에 통화공급을 늘리지 않고 무슨 수로 실세금리가 내려가도록 할 수 있는지 정부나 민정당·재계관계자들에게 두루 묻고 싶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부가 이번에 속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것이나, 모처럼 한 건을 한 재계가 정작 시큰둥한 것이나, 금융계는 금융계대로 볼멘 것이나 다들 금리인하의 폭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통화공급의 문제가 목의 가시처럼 걸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금리인하 문제이전에 통화공급문제, 또 그 이전에 노사분규 해결이나 정국의 안정문제 등 문제의 본질에서부터 수순을 밟아오지 못하고 급한 수가 나오게끔 한 책임은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수길<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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