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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81) 연정가(戀情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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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연정가(戀情歌)
무명씨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날작시면
님 계신 창밖이 석로(石路)라도 닳으리라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 병와가곡집

간절하고 애틋한 사랑 노래

만약 내가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가 난다면 님 계신 창밖이 돌로 된 길이라 하더라도 닳을 것이다. 그러나 꿈길이 자취가 없어 님에게 보여드릴 수 없으니 그것이 슬플 뿐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간절한 연시다. 이옥봉의 한시에 이와 유사한 작품이 있다.

근래안부문여하(近來安否問如何) 요즘 안부 묻습니다. 잘 계신지요?
월도사창첩한다(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비단 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약사몽혼행유적(若使夢魂行有跡) 꿈속 혼이 다닌 길에 자취가 남는다면
문전석로반성사(門前石路半成沙) 님의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 되었으리.

위 시조는 조선 광해군, 인조 연간에 활동한 이명한(1595~1645)의 작품이란 설이 있다. 이옥봉은 조선 선조 대의 인물로 1592년 임진왜란 와중에 행방불명되었으니 이명한 작이라면 당대에 유명했던 이옥봉의 한시를 모티브로 했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너무나 닮았으므로 후대에 누군가가 옥봉의 한시를 시조로 썼음직하다. 시조·한시 모두 빼어난 연시로 규방과 기방에서 널리 불렸다 한다.

수도권 코로나19 방역의 4단계 격상으로 예정했던 결혼식의 90%가 연기됐다. 이 연인들의 문 앞 돌길도 닳아 모래 되고 있지 않을까?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