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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와 정이 담긴 여행정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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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머문 지 보름이 지났다. 이곳에 올 때 나는 라오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과거를 마무리하고 현재를 정리하기 위해 떠나야만 했고, 짐을 꾸렸다. 한국어로 쓰인 책들로 짐 가방은 가득 찼고, 여행을 위한 안내서 한 권 들어갈 틈이 없었다. 처음부터 '여행이나 관광'은 일정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보름이 지난 지금 나의 숙소에는 여행을 위한 지도와 메모와 엽서로 된 사진이 가득하다.

온종일 숙소에서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소설을 쓴다. 그러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으로 저녁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나는 밖으로 나간다. 제대로 된 저녁 한 끼를 위하여 남푸까지 40분을 걸어간다. 내가 늘 저녁을 먹는 곳은 남푸 근처에 있는 '콥차이두'라는 식당인데,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있으면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거나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는 여행객과 대화하게 된다.

"정말? 비엔티안에만 있었다고? 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떠나! 빨리! 방비엥이 얼마나 근사한데. 강.나무.산…. 내가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소를 알려줄까?"

싱가포르에서 온 마흔 살의 노처녀, 패트리샤는 내게 그녀가 머물렀던 방비엥의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적어주었다. 메모지가 없어서 그녀는 내가 갖고 있던 1달러짜리 귀퉁이에 그곳의 이름을 적었다.

"루앙프라방은 정말 조용하지. 사원과 사원…. 끝없이 계속 나타날 것 같은 사원들을 누비고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아. 보여줄게."

마틴은 네덜란드에서 온 의사인데, 5주 동안 태국과 베트남을 여행하고 팍세로 갈 예정이었다. 나는 마틴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루앙프라방을 알게 되었다. 시동이 걸릴 것 같지 않은 낡은 버스들이 멈춰 서 있는 버스 터미널과 금칠이 되어 있는 왓 마이 사원의 부조들, 푸시에서 내려다본 그곳의 저녁 풍경까지, 마틴은 내게 무어라도 하나 더 보여주고, 알려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내 계산서의 뒷면에 보트 선착장과 게스트하우스가 몰려 있는 거리의 약도를 그려주었다.

"사바이디? 그건 안녕이라는 뜻인걸. 자, 여길 봐. 여기 그렇게 씌어 있지? 그리고 물은 '남'이야. 물 좀 더 주세요는 남 익! 얼음은 남콘, 얼음 없이 그냥 물을 달라고 하고 싶으면 보사이 남콘! 넌, 여기 더 머무를 거야? 그럼 이걸 줄게. 여긴 그나마 수도라서 괜찮지만 지방으로 가게 되면 이런 정도는 알아야 할 거야."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조는 자신의 여행 안내서에서 몇 장을 뜯어 내게 주었다. 라오스 말을 영어로 설명해 놓은 부분이었다.

지금 내 지갑에는 방비엥의 게스트하우스 주소가 적혀 있는 1달러짜리가 들어 있다. 침대 머리맡 위에는 마틴이 그려준 약도가 붙어 있고, 책상 위에는 조가 자신의 여행 안내서에서 뜯어준 라오스 말 풀이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내 책상 서랍 속에는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게 나눠주고 간 정보가 가득하다. 비엔티안에 있는 마사지숍의 명함과 게스트하우스의 광고 팸플릿과 지도들까지.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들은 그저 정보에 지나지 않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것으로 쉽게 찾아내고 불러 모았던, 인터넷에서 찾아낸 정보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그 무엇에 스며 있는 '온기' 혹은 '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무엇의 힘 때문인지 나는 내 짐 가방에 그들이 나눠준 것들을 챙겨 넣고 '이제야말로 여행을 시작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명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