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법원, 안락사 간접 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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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란이 치열한 가운데 미국 연방 대법원이 안락사를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대법원은 17일 안락사를 돕는 의사들을 무조건 처벌토록 한 법무부의 조치는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 오리건주 '존엄사법'=판결은 1997년 오리건주에서 주민투표로 통과된 존엄사법을 둘러싼 소송 결과다. 이 법은 불치병 환자에게 '경건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한다. 2명 이상의 의사로부터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극약을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법이 통과된 뒤 오리건주에선 많은 수의 안락사가 이뤄졌다. 2004년 말까지 325명이 극약을 처방받았으며, 208명이 자기 의지에 따라 생명을 끊었다. 미국 내에서 안락사가 합법인 곳은 오리건주가 유일하다.

◆ "안락사 돕는 의사 처벌"=존엄사법에 대한 반대는 극렬했다. 성직자와 보수주의자를 중심으로 법 폐지 운동도 일었다. 결국 안락사 반대론자인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이 2001년 2월 취임해 이 법에 제동을 걸었다. 같은 해 11월 존엄사법을 사실상 무효화하는 '법무부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애슈크로프트의 행정명령은 다시 한번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연방정부 각료인 그가 의료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느냐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미국의 법 체계상 의료 행위에 대한 규제권은 주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오리건주는 "애슈크로프트의 행정명령은 월권"이라며 이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애슈크로프트는 70년 제정된 '약물규제법' 등을 근거로 자신의 조치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법은 "모든 약품의 처방은 정당한 의료 목적을 위해 실시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살을 돕는 것은 정당한 의료목적에 해당할 수 없는 만큼 안락사를 지원하려고 극약을 처방해 주는 의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게 애슈크로프트의 주장이었다.

◆ "안락사 허용은 주정부가"=오리건주는 1, 2심에서 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불복했다. 애슈크로프트의 후임인 앨버토 곤잘러스 현 법무장관은 2004년 11월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외형적으론 법 체계상의 문제를 따진 모양새였다. "의료 문제에 대한 규제는 각 주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할 일이며 연방정부에서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법무부의 행정명령을 부당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은 상당한 의미를 달았다. "판결이 법 체계 문제에 심판을 내린 것이지만 실제론 안락사 옹호론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존엄사법을 반대해온 부시 행정부에는 패배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 지난해 9월 취임한 존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언론은 주목했다. 판결에 그의 성향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법무부의 조치를 옹호하는 소수 입장을 취했다. 안락사 문제에 보수적 태도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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