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달라진 한국 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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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70년대 초에는 택시를 타고 가다 마늘 냄새가 난다고 도중에 쫓기다시피 내린 한국인도 있었고, 김치 먹고는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어요. 아파트 얻기도 어려웠고, (일본인들 눈총 때문에) 밖에서는 한국 신문 읽기도 힘들었죠."

정준명(鄭埈明)일본삼성(삼성재팬)사장이 지난 8일 일본삼성 건물 준공을 주일특파원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옛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삼성이 50년 전 일본에 진출한 이후를 회고하면서였다. 지금 일본에서 부는 '한류'(韓流)바람을 생각하면 쉽게 실감이 가지 않는다. 지금은 공영 TV가 한국드라마를 인기리에 방영하고,한국말을 배우거나 김치를 먹는 일본인도 많이 늘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정이 크게 달랐던 것 같다. 지난해 주일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한 공무원은 "90년대 중반 대사관 직원들이 '아침에는 김치 먹지 말고 출근하자'고 의견을 모은 적도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작별의 인사를 대신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하루 평균 1만명이 양국을 오갈 정도로 인적 교류가 늘어났다. 그만큼 양국 간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경제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인 것 같다.

鄭사장은 "일본 유명기업은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을 무시해 임원조차 만날 수 없었다. 지금은 기업 총수도 쉽게 만나고 협력관계도 활발해졌다"며 "삼성이 이제는 반도체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컸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본에선 삼성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기업이 활약하고 있다. 도쿄(東京)시내에선 한진그룹.한국계 은행들의 간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LG전자 광고판을 단 버스도 돌아다닌다.

진로소주는 일본 소주시장의 1위고, 현대자동차도 일본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늘자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은 한국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이다.

한국이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파트너가 되면서 태도가 달라지고, 이해의 폭을 스스로 넓혀왔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한국경제가 고꾸라진다면 이야기는 언제든지 달라질 것이다.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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