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광부 90%이상 진폐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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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0년대 초까지 광부로 일하다 최근 정선자활후견기관(일종의 사회봉사기관=편집자주)에서 일하고 있는 김창완 실장은 자신이 광산에서 일하게 된 것은 순전히 젊은 혈기때문이라 했다. 강원대학을 다니다 휴학계도 내지 않고 무작정 탄광을 찾았다. 삶의 진지한 맛을 직접 느껴보겠다며 80년대 중반 안전장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작은 탄광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실장은 큰 탄광에 비해 소규모의 탄광 이른바 '쪽닥구뎅이'라고 불렀다. 광부들이 쓰는 은어다.

"처음 일한 곳은 사북지역(태백시에서 약 30분거리에 있는 탄광지역=편집자주)에 있는 작은 쫄닥구뎅이였습니다. 지하를 운행하는 축전차가 없어 사람이 직접 탄차를 밀고 다녀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소규모 탄광에서 약 1년간 일을 익힌 김실장은 대규모 탄광으로 일자리를 옮기기위해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동원탄좌에 입사원서를 냈다. 그러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로 떨어졌습니다. 광부 학력은 고졸이하거든요. 전문대나 대학교 학력이상은 광부로 취업할 수 없었습니다."

더 많은 돈과 경험을 얻기위해 지원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자 김실장은 이직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당시 동원탄좌에 근무하던 한 대학 선배가 김실장에게 기회를 주면서 결국 탄광을 옮길 수 있게 됐다.

"당시 좋은 탄광업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치뤄야했습니다. 그만큼 인기있는 직업이었거든요."

탄광에서 일을 하면서 점차 광부들의 역할과 권리를 알기 시작한 김실장은 노조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광부들의 노동력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사실 저는 운동권 출신은 아닙니다. 탄광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노조운동으로 징역살이까지 했던 김실장은 출소후 1995년 대학에 복학했고 다음해에 졸업했다. 김실장이 휴학계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무단으로 등록하지 않자 대학은 김실장에 대해 제명처분을 내렸었다. 그러나 다시 복학허용을 받아 우여곡절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한 지역봉사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10년차 광부 90%이상 진폐환자

김실장은 당시 쫄닥구뎅이에서 채탄작업을 시작했다. 막장에서 탄을 캐는 일이 다른 일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당시 급여는 35만원에서 40만원 수준으로 서울의 일반 제조업체 사원이 잔업과 야근까지 해서 받는 임금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또 삶의 밑바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좋은 직업도 드물었다. 여러모로 김실장에게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사진=탄광 지상모습. 쌓여있는 채탄을 운반하는 화물차와 인부들이 보인다)

학교선배의 도움으로 그는 동원탄좌로 직장을 옮겨 탄맥을 잡으면서 돌을 캐는 굴진부를 지원했다. 다른 업무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김실장은 당시 55만원정도의 급여를 받았다.

막장에서 채탄하는 광부는 선산부 한명과 후산부 두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산부는 버팀목을 잘 다루거나 이런저런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다. 후산부는 캐낸 석탄이나 잔여물 따위를 갱도밖으로 빼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당시 광부일을 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사실 죽을 때까지 막장에서 일 할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게 전.현직 광부들의 전언이다. 작업환경이 워낙 험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진폐증 같은 직업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사고로 죽거나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경우, 다음날 일하러 갈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하던 사람들 중에 꾸준히 저축을 하던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1년에 5백만원에서 6백만원까지 저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통 5년정도 고생하면 어지간한 장사기반을 마련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광산으로 사람들이 몰렸지요."

쫄닥구뎅이에서 작업할 때 막장이 무너져 두번 갱도에 갇혀본 기억이 있는 김실장은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18시간동안 또 한번은 6시간동안 막장에 갇혀있으면 그 다음날은 일을 하기 싫을 정도라고 했다.

해발 300미터에서 100미터에 위치하고 있는 쫄닥구뎅이가 무너지는 경우는 그나마 안전한 평이라는 게 김실장의 경험이다. 지압이 크지 않아 갱도가 내려앉아 고립돼도 건너편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큰 사고는 아지만 쫄닥구뎅이가 내려앉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영세업체가 탄을 캐는 것이기도 하지만 버팀목도 허술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형업체가 운영하는 큰 탄광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지압 때문에 대형사고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작업환경에 워낙 익숙한 때문인지 막장이 오히려 아늑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갱도는 습하지만 채탄 막장은 오히려 건조하기 때문에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광산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갱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탄가루가 폐에 쌓여 생기는 진폐증을 무서워한다.

보통 10년 이상 광부일을 하면 90%가 진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심한 경우 6개월만 작업을 하고도 진폐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원래부터 몸이 안 좋거나 폐가 안 좋은 경우의 이야기다.

"보통 광부일을 5년에서 7년 정도하면 건강이 위험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광부 일을 그만두고 진폐에 대한 걱정으로 의료기관들을 돌아다니며 검사를 받다가 예전에 쫄딱구뎅이에서 같이 일하던 선산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진폐환자로 입원해 있더군요. 같이 작업할 당시 그 사람이 30대 였는데 내 기억으로는 열살 때부터 광산일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진폐환자, 병원에서도 '찬밥'신세

진폐증엔 치료약이 없다. 다양한 진폐증이 있지만 일단 진폐증에 걸리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광부의 일을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광산촌의 생리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탄광에 와서 갱밖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광부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식으로서 부모가 얼마나 힘들게 생활하는지 직접 목격을 하면서도, 또 그 일이 거칠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아는 게 그것뿐이라고 광부일에 손을 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진=대한석탄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장성광업소의 제2수갱. 지하 수 백미터에서 탄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진폐증에 대한 국내 의료혜택에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진폐에 관련된 법적 조항들은 일본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다. 진폐병만으로는 의료 및 기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특히, 진폐증이 의증(진폐로 의심이 되는 증상)인 경우에는 병원치료가 전혀 불가능하다. 진폐병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해야 비로소 입원이 가능하다.

"진폐환자를 병원에서 진료를 해주느냐 마느냐 보다는 현재 일곱가지로 한정되어있는 합병증의 종류를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곱까지 합병증에 속하지 않으면 병원진료를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진폐로 인한 합병증인데도 불구하고 법으로 정해진 일곱가지 합병증 증세에 해당되지 않아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은 절박하기만 합니다."

국가 경제를 위해 탄광 막장에서 탄가루를 마셔가며 일했지만 진폐환자들은 병원 입구에도 가지 못하는 셈이다. 탄가루를 더 마셔서 다른 합병증 그것도 법에 규정된 합병증을 유발시켜야만 병원에 입원할 수 있다. 결국 죽을 때가 되서야 병원을 들리라는 말이다.

진폐로 병원에 입원 치료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진폐판정을 내리는 병원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병원에 아는 사람을 통해 심하지 않은 진폐환자를 입원시키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중간 브로커가 생겨날 정도다.

"근로복지공단이 생기면서 진폐에 관한 일처리가 깔금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보다 진폐판정이나 비리, 부정에 대한 목소리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래도 많진 않지만 여전히 중간 브로커는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광부일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진폐환자가 많아지면서 태백지역은 노년층과 소년.소녀 가장이 늘어났다. 특히 폐광이 빠르게 진척되면서 도시 전체가 슬럼화되면서 경제력이 있는 중간의 중.장년층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사진=지하탄광에서 버팀목을 운반하는 탄차)

광부는 자신의 아들이 광부일을 하고 싶어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실장은 손을 내저었다.

"말릴 겁니다. 사람이 할 일이 아니거든요. 여건이 너무 안 좋은 직업입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다른 직종보다 보수라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반 제조업보다도 낮은 보수를 받고 있으니까요."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다른 것 보다는 돈 벌기는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했다. 주택이 무료로 공급되고 상권의 특성상 돈 씀씀이를 크게 둘일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돈을 벌어 외지로 나간 사람의 많은 수가 가정파탄을 맞이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 광부들의 말이다.

"여기서는 빈부차이 없이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생활을 했는데 외지로 나가보니까 빈부격차가 확실히 드러나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이곳에서는 탄광일로 어느정도 안정되게 살 수도 있겠지만 외지에서는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들거든요. 이래저래 광부들은 힘든 환경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장취재=노진섭. 임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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