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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만원이 7억원 둔갑…'0' 하나 더 붙인 곗돈사기 황당기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전에 사는 50대 A씨(여)는 2017년 순번에 따라 곗돈을 받는 이른바 ‘번호계’에 가입했다. 21명의 계원이 곗돈을 납부하고 돌아가며 순번(20개 구좌)에 따라 3000만원씩 타는 방식이었다.

대전지법은 곗돈을 납입하지 않았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포토]

대전지법은 곗돈을 납입하지 않았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포토]

A씨는 계주에게 “앞번호에 나를 넣어 곗돈을 타게 해주면 이후에도 돈을 틀림없이 불입하겠다”고 요청한 뒤 두 번에 걸쳐 각각 3000만원씩 6000만원의 곗돈을 받았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곗돈을 불입하지 못했다. 이에 계주는 “A씨가 사기를 쳤다”며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 대출규모 7000만원→7억원으로 판단 #거액의 빚 때문에 사기친 것으로 결론, 송치 #검찰, 경찰의견 그대로 수용한 뒤 수사·기소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A씨의 채무를 조사하면서 신용정보회사로부터 보고서를 받았다. 신용평가회사가 경찰에 보낸 자료에는 ‘A씨가 15개 대부업체로부터 7000만원을 대출받았다’고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기록에 ‘피고인이 7억원 상당의 대출을 받은 후 현재까지 변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고 기록하고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7억원에 이르는 빚 때문에 A씨가 곗돈을 꾸준히 납부할 뜻이 없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었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도 경찰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 A씨를 사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의 공소장에는 ‘피고인이 당시 대부업체로부터 거액의 대출을 받고도 갚지 못한 상태였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A씨가 대출을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번호계에 가입해 돈을 가로챘다는 취지였다.

대전지법은 경찰의 오독으로 사건이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포토]

대전지법은 경찰의 오독으로 사건이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포토]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의 부실한 수사가 그대로 드러났다. 경찰이 ‘1000원’ 단위로 기재된 신용정보회사의 자료를 ‘10000원’ 단위로 잘못 읽은 바람에 A씨의 채무를 10배나 부풀린 것이다. 사기죄의 중요한 기준이 된 ‘거액의 대출 현황’은 7억원이 아닌 7000만원이었다. 검찰도 이런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A씨를 기소했다.

사건을 심리한 대전지법 형사3단독 구창모 부장판사는 “경찰이 신용정보회사의 보고서를 오독해 터무니없고 엉뚱한 결론에 이른 것”이라며 A씨의 사기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모욕죄에 대해서는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구 부장판사는 “문제는 이러한 오해가 검찰에 사건을 송치할 때까지 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도 (경찰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 수사와 기소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어 “피고인이 무려 7억원이라는 거액의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번호를 배정받고 번호계에 가입한 것을 전제로 공소가 제기됐다”며 “거액의 대출이 7억원을 암시하는데 실제로는 10% 수준인 7000만원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대전지법은 곗돈을 납입하지 않았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대법원 전경. [중앙포토]

대전지법은 곗돈을 납입하지 않았다며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대법원 전경. [중앙포토]

구 부장판사는 “피고인의 소득 자료와 피고인이 납부한 곗돈이 4700만원에 이르는 점 등으로 미뤄 일부를 연체했다는 피고인의 진술에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개인 간 거래에서 돈을 빌릴 당시에는 갚을 의사와 능력이 있었지만 이후 갚지 않더라도 이는 민사상 채무 불이행에 불과할 뿐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례(2016년 4월 28일)가 있다.

대전=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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