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할아버지´들 퇴직후 여행 즐기며 새삶

중앙일보

입력

출근할 곳이 없는 정년 퇴직자들에게 아침은 또다른 불안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자신이 평생 쏟아부었던 정열과 사랑에 대한 상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퇴는 일로부터의 해방이며, 새로운 삶을 가꾸는 인생의 전환점이다.

최근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사회참여를 다양하게 모색하는 ´젊은 할아버지´ 들의 제2의 인생을 들여다 본다.

지난 21일 5박6일간의 일본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신병일(68.대전시 대덕구 법동)씨.

"패키지 여행의 경우 가이드만 따라다니게 되니 여행의 참 맛을 못 느끼죠. 한국인 가이드에게 한국말로 설명을 듣고 한국음식을 먹고 다니면 마치 국내를 여행하는 것 같잖아요. 배낭여행을 통해 낯선 외국의 풍물과 직접 부닥치며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

그는 여행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떠올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 배낭 하나만 둘러메고 떠난다는 것이 처음엔 불안했지만 다녀온 뒤엔 기쁨이 더 컸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신씨는 65세 정년 퇴임 이후를 여유있게 준비해왔던 경우. 그는 옛 동료 교사들과 매주 화요일이면 산에 오르고 매주 금요일이면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기모임을 마련해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

이번 배낭여행도 이 모임 멤버 몇명과 계획해 실행에 옮긴 것.

일본여행센터가 올 1월 신설한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신씨처럼 일본을 다녀온 50~70대 장.노년층은 올들어 5백여명이나 된다.

부산을 출발해 후쿠오카.오사카.교토.나라.고베.오이타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고된 여정이지만 이들의 일본 배낭여행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자칭 ´새내기 백수´ 인 박정호(58.서울 성동구 응봉동)씨는 지난 3월말 30년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퇴직자 대열에 들어섰다.

부인 박봉숙(51)씨가 30년 동안 직장생활만 해온 남편의 백수생활 적응을 위해 만든 것은 남편만의 공간.

지방에 내려간 아들의 방을 남편의 사무실로 개조해 좋아하는 책들과 컴퓨터.프린트.팩스.게시판.전화기를 설치하고 사진.명함들을 들여놓아 사무실처럼 꾸몄다.

아침 출근 시간이면 남편 박씨는 이곳으로 들어가 친구들과 연락도 하고 옛 동료들과 사이버대화도 나누며 자신의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

"집안에 직장의 연장선상과 같은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남편도 적응기가 필요했으니까요. 게시판에 하루의 일정, 외출할 때 기억해야 할 사항과 가족의 뉴스 등을 적으면서 함께 생활하는 즐거움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어요. " 아내 박씨의 말이다.

전문가들이 젊은 은퇴자들의 성공적인 사회적응에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 것은 가족의 협조와 취미생활의 개발. 특히 치열한 경쟁이 몸에 밴 전문직종 은퇴자들의 경우 옛동료와 교류가 없는 경우가 많아 자신만의 취미개발이 더욱 중요하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훈구 교수는 "갑자기 집에서 아내와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 전통적인 남자들은 말이 없어지고 집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홀로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심리적인 문제가 두통.무기력 등 내과적인 질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며 "가족들과 대화방법을 찾고 취미생활을 가지면 이 시기를 슬기롭고 즐겁게 극복할 수 있다" 고 조언했다.

반면 새로운 직장을 찾거나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젊은 할아버지들도 많다.

서울 상계동에 위치한 평화복지회에서 명심보감을 가르치는 박준영(70)씨는 재직시절부터 공부해온 한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경우.

이밖에도 유적발굴과 박물관 봉사 과정인 연세대 사회교육원의 ´문화재 탐방과 볼런티어´ 에는 30여명의 퇴직 장년층이 수강 중이다.

그러나 장년층의 구직 노력과 자원봉사 욕구에 비해 우리나라의 사회적 여건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임춘식 교수는 "미국은 65세 이상의 50% 이상이 자원봉사활동에 종사한다" 며 "우리나라도 은퇴 장년층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봉사활동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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