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는 아름답다] 움직이면 ´살맛´ 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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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는 가정의 기둥이며 사회의 얼굴이다. 그러나 집에서 남편.아이 뒷바라지를 하다 보면 아무런 쓸모없는 ´밥순이´ 로 전락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취업주부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과 가정 어디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방황하는 일이 잦다.

    5월은 가정의 달. 그동안 가족에 얽매여 기(氣) 죽어 지내던 아내.엄마들의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주부는 아름답다´ 시리즈를 5회에 걸쳐 펼친다.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사는 최현정(29) 씨네 안방엔 아동복이 행거에 잔뜩 걸려 있다. 그 사이를 돌배기 아들 주용이가 헤집고 돌아다닌다.

    오전 9시가 되자 최씨는 주용이를 왼팔로 끌어안고 방 한편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http://www.andy.co.kr)에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틈틈이 엄마품에서 떨어져 주변에서 맴돌던 주용이가 1시간쯤 지나자 칭얼거리며 보챈다.

    "애구, 우리 왕자님이 잘 시간이 됐군요. "

    최씨는 주용을 품에 안고 아기방으로 가서 20여분만에 재우고 나온다. 이후부터는 최씨의 손놀림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조금전 주문 확인한 유아동복을 보내기 위해 포장하는 것이다.

    최씨는 다른 주부들처럼 임신.육아문제를 고민하다가 ´잘 나가는 직장´ 을 포기한 대표적인 케이스.

    1998년 취업주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한국여성개발원의 장혜경 연구위원(사회학박사) 은 "취업주부의 45%가 결혼과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며 "이로 인해 결혼.출산.육아기에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일시적으로 퇴장해 우리나라 여성의 연령별 취업구조가 ´M자´ 곡선을 그리는 특이한 양상까지 보일 정도" 라고 설명했다.

    "막상 전업주부로 돌아가 주용이까지 낳고 나니 이전에 다니던 직장동료나 친구들에게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어요. " 최씨의 회고다.

    최씨는 이때부터 다시 자신의 일을 찾아나섰다.그러나 역시 주용이를 키우는 것이 걱정이었다.

    "흔히 육아는 양(量) 보다 질(質) 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양과 질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두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쉽지 않았지만 직접 주용이 옷을 고르면서 쌓은 노하우와 직장에서 배운 컴퓨터 실력을 접목시켜 유아동복을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쇼핑몰을 개설키로 했다. 상품을 알릴 사진을 찍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1백만원에 구입했고 초도 상품비로 5백만원을 썼다.

    인터넷 사이트는 경영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사업구상 4개월만에 만들어 띄웠다.

    최씨는 "쇼핑몰을 연지 아직 반년밖에 안돼 경제적으로 큰 도움은 안되지만 주용이를 하루종일 돌볼 수 있어 좋다" 며 "권위적이던 남편도 청소 등 가사를 도와줄 정도로 협조적으로 바뀌었다" 고 자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업주부들은 남편과 자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삶에 의욕을 잃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다. 송명자(35.서울 마포구 공덕동) 주부가 그랬다.

    그런 송씨가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얼마전 자신의 통장에 입금된 52만8천원 때문이다.

    이는 송씨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일을 해 번 돈. 아직까지 어디에 써야할지 몰라 통장안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즐거워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농사일을 돕다가 결혼했어요. 이후에도 남편이 벌어다준 월급만 쪼개 살림했지요. 올해 막내딸 송희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

    생활비에서 따로 자신만을 위해 쓸 돈이 없던 송씨가 찾은 곳은 한국부인회가 운영하는 ´마포 신촌 일하는 여성의 집´ . 한달동안 컴퓨터 무료강좌를 받고 나서 이곳의 추천을 받아 개인사무실 워드작업 일까지 얻게 됐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나도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자긍심이 생기면서 한동안 앓던 우울증도 말끔히 사라졌어요. "

    송씨는 자신이 일을 가진 뒤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 더 놀랐다고 한다. 큰 아들(초5) 은 학교에서 돌아온 두 동생을 돌봐주기도 하고, 둘째(초3) 는 자신을 ´능력있는 엄마´ 로 새롭게 보는 것 같다며 행복해했다.

    송씨처럼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들이 바깥 활동에 나서는 경우는 다양하다. 주부 김현숙(36.서울 상계동) 씨는 동네 할인매장 식품코너에서 매일 오후 4시간씩 일한다. 조미옥(34.경기도 성남) 씨는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영어강사로 잠깐씩 나간다.

    최근 한국여성개발원이 발표한 전업주부의 사회활동연구 자료에 따르면 전업주부의 절반 가량(43%) 이 문화.학습 등 자기계발은 물론 자원봉사나 부업 등을 통해 꾸준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지역사회협의회 이용경 국장은 "생활형편이 나아지면서 경제적인 문제보다 잠재된 자기성취를 위해 집밖에서 열심히 사는 주부들이 늘고 있다" 고 말했다. 이어 그는 "프로정신으로 무장하고 온가족이 모두 각각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업주부도 가족안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정보과학부 고종관 차장, 유지상.최지영.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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