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커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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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정철 카피라이터

눈이 마시는 음료. 우리는 입으로 액체를 마시며 동시에 눈으로 그 진한 색깔을 마신다. 커피의 진함 속엔 추억, 설렘, 용서, 차분, 응원 같은 것들이 고요히 스며들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추억을 마시는지, 누가 설렘을 마시는지, 누가 용서를 마시는지 알 수 없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마시는 같은 진함. 이것이 커피의 잔잔한 매력이다. 만약 커피가 투명한 색이었다면 지금처럼 넓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사전』은 ‘커피’를 이렇게 풀었다. 이제 커피는 어쩌다 기분으로 마시는 액체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왜 우리는 일상에 커피를 들여놓았을까. 맛있어서? 멋있어서? 이미 중독되어서? 혹시 외롭기 때문은 아닐까.

도시엔 수많은 혼자가 산다. 혼자 있어도 혼자. 함께 있어도 혼자. 혼자들은 안다. 오늘도 외로움에게 몇 대 얻어맞을 거라는 것을. 그 쓰린 상처를 안아주는 병원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커피.

사람사전 4/22

사람사전 4/22

커피는 언제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외로움 치료제다. 세상에서 가장 차분한 자세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귀로 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런데 우리는 외로움을 마시면서 추억을 마시는 척. 설렘을 마시는 척. 용서를 마시는 척.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이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니까.

오늘도 우린 친구라는 익숙한 외로움 치료제를 포기하고 커피와 마주 앉는다. 친구가 쉽게 하는 말을 커피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커피는 바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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