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생명] 안락사 허용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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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는 윤리규범은 전쟁이나 정당방위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모든 인류, 특히 생명유지를 돕는 직업인인 의사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다.

그러나 고통스런 날들이 무의미하게 연장되는 경우 환자들은 ´(고통없이) 죽을 권리´ 를 요구하게 됐고 이런 변화는 의사들의 전통적 윤리규범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1977년 스웨덴의사 라그나 토스는 매년 자살하는 2천명 이상의 스웨덴인들을 도와주기 위한 ´자살 의원(suicide clinic) ´ 설립을 국가에 요청해 충격을 주었다.

지난 세기말 1백여명의 환자를 죽음으로 이끈 미국 ´죽음의 의사´ 케보키언의 등장은 ´살리는 의사´ 가 아닌 ´죽이는 의사(terminator) ´ 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케보키언처럼 치명적인 가스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 조작을 가할 경우를 능동적 안락사라고 한다.

서부영화에서 부상당한 말을 쏘아 죽이는 주인의 행위인 ´자비로운 살해(mercy killing) ´ 와 맥을 같이 한다.

반면 환자의 생명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의隙?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인위적인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자연 경과에 따라 죽도록 허락하는 것(letting die) 을 수동적 안락사라 한다.

능동적 안락사란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타인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자살´ 인 셈이다.

살인이 일급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기인한다고 할 때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자살이야말로 인간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비이성적인 자기파괴 행위다.

때문에 적극적 안락사는 부상당한 말에 대한 동정심을 빌미로 허용될 수 없는 명백한 살인행위다.

회복 불가능한 중증의 뇌손상으로 기계에 의지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환자에게 ´살아있음´ 의 의미란 무엇일까.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음식의 맛을 볼 수도 없는 환자에 대한 인위적 생명연장 시술은 인간의 사회성과 삶의 질을 고려할 때 생명존중보다 인격모독에 가깝다.

따라서 수동적 안락사는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문만을 열어둬야 한다.

´회복 불가능´ 이라는 의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며 의료 잠재력이 넉넉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칫 경제논리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능동적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호스피스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완치를 목표로 하는 의학과 달리 환자의 통증조절과 정신적 지지에 역점을 두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도록 하는 진료형태다.

기원전 4세기께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는 "나는 누구에게도 독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비록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더라도-그런 계획을 제안하지도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정유석 <단국대 의대 교수, 가정의학.의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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