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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자가 되기 힘든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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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신문의 머리기사 제목들을 보면 낙관주의자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핵기술은 날로 확산하는 추세인 데다 유가는 지난 3년간 세 배로 뛰었다. 아프가니스탄.수단, 그리고 중동 전 지역에서 폭력사태가 번지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테러리스트 세대가 등장하고 있으며 지정학적 불안도 커지고 있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미래가 밝을까. 그럴 수도 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처한 환경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 유엔은 인간의 기대 수명이 지난 반세기 동안 46세에서 65세로 늘었으며 금세기 중반까진 75세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또 세계화로 중국과 인도.러시아.동유럽.중남미의 30억 인구가 새롭게 세계 경제의 주류에 편입됐다. 개인들은 역사상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 물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주어진 기회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긴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기술의 진보는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이로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현재의 상황 때문에 앞으로 세계가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과학기술의 또 다른 면이 있다. 저명한 우주학자인 마틴 리스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2003년에 펴낸 저서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서 2000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에서 시작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과학자들은 우주 대폭발(빅뱅) 직후의 환경을 재현하기 위해 최신 입자 가속기를 이용했다. 리스 교수는 이 실험 과정에서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블랙홀과 같은 초고밀도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계산에 의하면 그런 재앙이 닥칠 가능성은 5000만 분의 1이었다. 과학자들은 이 희박한 확률을 믿고 실험에 들어갔다. 어떤 감시기구의 승인이나 감독도 없었다. 리스 교수에 따르면 그들은 단지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지구를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물론 리스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과학적 진보가 새로운 위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기술의 발전은 개인과 소집단에 세계를 보다 개선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갈 능력도 부여했다. 리스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몇몇 과학자들이 자칫 지구의 생명체 모두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더라도 그 위험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단지 5000만 분의 1의 확률뿐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브룩헤븐 프로젝트는 고의적인 위협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낫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불량국가나 테러조직이 인명을 앗아가고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수단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에선 파괴적 기술은 언제나 이를 방지하는 기술도 낳게 마련이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기술낙관론자로 유명한 레이 커즈웨일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한 기술이 결국 오늘날 인터넷을 이처럼 풍성하게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유전자 복제나 나노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협이 커질수록 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도로 네트워크화된 세계 경제는 어느 한 부분의 오작동으로 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한갓 단기적 위험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정치.사회적 갈등과 함께 테러리스트를 비롯한 소수 집단이 세계 시스템을 공격하려는 시도는 계속 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 핵 확산과 국경을 넘나드는 테러, 그리고 정치적 소요와 결합해 전례 없는 위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언 브리머 국제정치 컨설팅회사 유라시아 그룹 대표

정리=조민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