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혁 양철냄비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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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치를 하다 보면 이런 수도 있고 저런 수도 있지 않으냐고 어떤 정치인이 최근 말했지만 우리정치는 너무 심하게 이러는 가 하다가는 저러고, 저러는 가 하면 갑자기 이러고 해서 갈피를 잡기 어렵게 한다.
어느 한 문제에 대해서도 진득하고 묵직하게 나가는 것을 보기 어렵고 불과 1주일, 2주일만에 판이 왕창왕창 달라지니 순진한 사람이면 간떨어지기 좋을만하다.
최근 정국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야권 3김 총재와 일일이 화기로운 통화를 한 것이 지난 14일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귀국하면 곧 영수회담이 열리고 가을정국에 뭔가 봄바람이 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1주일만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영수회담은 커녕 예정된 중진회담까지 사라지고 봄바람이 아니라 때 이른 겨울냉기가 정국을 감돌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는 한민족체육대회에 참가한 해외동포들을 위한 환송연이 열렸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평민·민주당의 두 김 총재는 같은 테이블에서 3시간이나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2주일후인 지난 16일 가수 이미자씨의 공연이 있은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두 김씨가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다른 두 당의 대표들과 함께 정답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공안정국이 지속되는 동안 평민·공화당간의 두 김 총재도 매우 불편한 관계였지만 일단 3야 공조관계가 되자 3김씨는 손에 손을 맞잡고 만면에 웃음을 띤 그 익숙한 모습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런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 최근 우리정치에서는 정국이 춘풍·냉풍으로 느닷없이 바뀌는가하면 친화·불화가 영문모르게 엇갈린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무슨 기준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그 오묘한 속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따라잡기도 힘든 신축자재라 할까, 신출귀몰이라 할까.
정치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해버리면 그뿐일지 모르나 그런 정치 아래 사는 국민, 그런 정치 아래살림과 사업을 계획하고 장래를 가늠해야 하는 국민으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와 정치인이 이념이나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떤 원칙이나 신념 위에서 움직여야 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 원칙이나 신념이 있다면 형편에 따라, 감정에 따라 정국이 쉽게 흔들리고 하루아침에 국면전환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래야만 정치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측성과 그 나마의 국민신뢰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정치에서는 그런 원칙이나 신념의 부재를 너무 자주 보게 돼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원칙·신념보다는 이해·인기·감정·체면 따위가 정치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정당이 온건에서 초 강경에 이르는 몇 가지 선택 중에서 어느 쪽을 어떤 동기에서 택하는가를 보면 이것은 명백해진다.
최근 대통령 귀국 후 여권이 대야 강경으로 돌아선 것은 3김 회담의「노 정권 퇴진」거론 때문이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역사적이고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미상·하원합동회의 연설을 하는 그 시간에 야당지도자들이 지원은 못할망정 합헌적 민선대통령의 중도퇴진을 거론했으니 확실히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 있어서는 3김씨 측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현 정국의 본질이나 3김 회담의 본질문제는 어디까지나「5공 청산」 이였다.
3김씨 측이 비록 부주의하게 퇴진을 들먹였더라도 그것이 5공 청산을 강조하자는 뜻이었음을 굳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불쾌사는 그것대로 처리하더라도 5공 청산이란 본질문제를 위한 영수회담과 중진회담은 살려나가는 것이 보다 사려 깊고 묵직한 정치였을 것이다. 5공 청산이란 기분이 좋을 때 하고 나쁠 때엔 안 해도 그뿐인 문제가 아니다.
여권이 5공 청산에 대한 원칙과 신념이 있었다면「불쾌」때문에 1주일전의 대야 온건에서 느닷없이 의원직 총 사퇴론과 같은 초 강경론까지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얘기는 야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1주일 전에는 영수회담에 응할 것처럼 보이던 태도가 왜 3김 회동에서는「노 정권퇴진」이란 초 강경론까지 들먹이게 됐는가.
그것은 어떤 원칙에 입각했다기보다 국민에게, 또는 자기 당 내부에 대해 각기 강하게 보여야겠다는 인기와 선명성의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신문에 크게 먹힐 거리를 하나 만들자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야간 분위기가 좋으면 임기는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가 기분이 나쁘거나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으면 중도퇴진을 거론한다.
중간평가문제만 하더라도 지난 3월엔 5공청산도 않고 무슨 중간평가냐고 하더니 이젠 5공 청산을 않으면 중간평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오늘의 정계를 보면, 원칙과 신념보다는 그때그때의 이슈와 세논에 따라, 유·불리에 따라, 감정 따라 눈치 따라 정치가 왔다갔다하고 말이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정국은 1주일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만성적인 표류상대에 빠지고 정치세력은 누가 어느 편인지 알쏭달쏭하기가 일쑤다.
일시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신념을 지키려는 정치인 상, 한때의 세론이나 감정을 떠나 일관성 있게 원칙을 고수하는 정치, 이런 정치인과 정치가 우리정계에서는 언제면 나올 것인가. 양철냄비 같은 정치가 아니라 천천히 데워지고 오래 식지 않는 묵직한 가마솥 같은 정치의 모습이 보고싶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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