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한 성격에 다정한 인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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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스페인 현대문학 사 책을 펴들면 첫 페이지부터 온통 카밀로 호세 셀라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는 스페인 내란(1936∼1939)후 태풍전야처럼 잠잠하기만 했던 스페인문단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즉『파스쿠알 두아르테 일가』(1944)라는 두께가 얇은 중편소설로 일약 무명청년에서 주목받는 문제작가가 되었다. 당시 비평계에서는 요란스럽게 떠들며 이 신인에게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출판된 책들은 꾸준히 잘 팔렸다.
내가 1965년 스페인으로 유학 갔을 당시에는 그는 이미 원로작가로서 스페인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불가피하게도 셀라를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다. 당시 나는 마드리드대학에서 석사학위획득 종합시험에 합격하고 곧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논문제목을 「현대 스페인작가들의 카스티야관」으로 정했었다.
셀라를 빼놓고는 논문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그가 내 논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그래서 그를 찾아갔더니 너무나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다. 또한 성격이 소탈해서 마치 옛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나는 감격했다. 그도 내가 자기의 작품세계를 논문의 주제로 삼는다는 사실에 대해 퍽도 고마워하는 표정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의 주제는 물론 그의 문학관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전통적 향기가 깃들인 어휘들을 발굴해서「소설」로 꾸미는 것을. 자신의 작가적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초창기 그의 문학적 경향(40∼50년대)은 내전직후의 스페인의 참담한 현실을 무자비한 표현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향을 가리켜 tremendismo(끔찍 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내가 만났을 때의 그는 이미 그런「살벌한」경지에서 벗어나 토속적이고 은은한 스페인소설을 창출하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내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경제부흥을 통해 중진국으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도 그런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적절히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의 대담시간은 내가 만족할 만큼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면회신청이 수없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작별의 인사를 하자 언제 한번 조용히 만날 기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속에는 다정한 인정미가 넘쳐흘렀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인상은 호랑이 상이다. 실례의 말 같지만 좀 심술스럽고 특히 눈매가 사납게 생겼다(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깡마른 얼굴에 귀가 커다랗다). 그러나 그의 음성이나 태도는 여간 부드럽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그 구수한 문체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약속을 지켰다. 마요르카섬(안익태 선생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활약했으며 관광지로 유명한 동부 지중해에 있는 섬)에 있는 그의 저택에 나를 초대한 것이었다.
그가 며칠간 자기 집에 머물면서 문학에 관한 담소를 나누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을 때 솔직히 나는 감격했다. 그러나 그 초대에 응할 수는 없었다. 귀국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귀국한 후에도 우리는 서신연락을 꾸준히 했다. 그는 나에게 그의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했다(1969년 6월 10일자).
단 조건은 그의 작품을 번역할 때마다 책 몇 권씩만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새책을 출판할 때마다 자필서명을 해 꼭 보내주었다.
정력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세계 각처에 초대를 받아 여행을 하고,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정신없이 바쁜 분이 한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 외국인에게 그런 세심한 배려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무언중에 배울 점이 많았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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