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문화

아름다운 나무 밑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는 지금 독일 뒤셀도르프에 머물고 있다. 7월부터 두 달간 독일에서 다섯 차례 강연할 계획이 있어서 이곳에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뒤셀도르프에서는 비행기나 철도를 이용해 독일 어디든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길을 따라 세워진 낡은 건물이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환경도 나쁘지 않다. 2층에 사는 집 주인은 넉넉한 인심의 노부인이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이들과도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 집세를 내기 위해 찾아가 인사를 하자 "둘째 며느리는 러시아인"이라며 가족 사진을 보여줬다.

내 방은 5층에 있다. 이 집엔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비지땀을 흘린다. 방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다. 그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많은 나무 덕분이다. 창문을 열면 눈앞으로 플라타너스 가지가 펼쳐진다. 싱싱하고 푸른 잎이 내 방에 기분 좋은 그늘을 선물해준다. 타들어갈 것 같은 건조한 바람도 한 차례 나뭇잎을 스치게 되면 어느새 촉촉하고 상쾌한 미풍으로 바뀌게 된다.

어디에나 있는 가로수지만 이곳의 가로수들은 수령 100년이 넘는 거목들이다. 큰 나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가 된다. 무수한 미생물과 곤충들이 이 소우주에서 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새가 집을 짓는다. 새들은 새벽녘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인사를 나누고, 해질 무렵에는 약속이라도 하듯 집으로 돌아온다. 이 새들을 노리는 짐승은 뱀과 고양이들이다. 나는 창에서 한두 시간씩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반짝이는 나뭇잎을 감상한다.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다.

독일에 올 때마다 이 나라의 풍요로움을 새삼 느낀다. 발달한 공업과 왕성한 상업 현장보다 이런 나무들 때문이다. 독일의 각 가정과 직장에서 에어컨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맥주 마시기를 좋아한다. 풍성한 녹지에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나라와 24시간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 어느 쪽이 풍요로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난 한 여성은 한국을 '단절의 나라'라고 말했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 빈곤과 급격한 경제개발로 사회의 연속성이 단절됐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여행을 하면서 이를 통감했다고 했다. "일본에는 여기저기에 오래된 나무들이 남아 있잖아요. 그런 나무를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사회가 단절돼 있기 때문입니다. 단절을 느낄 수 있는 일본 도시를 꼽자면 히로시마 정도일까요. 원자폭탄의 피해를 봤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 고교생 때 처음 방문한 조국에서 보았던 민둥산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렸다. 가난한 민중이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고, 그리고 '초근목피'라는 말 그대로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나무의 속껍질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한국에서 민둥산은 사라졌지만 겨우 10년을 넘긴 가느다란 나무들이 고작이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선 몇 세대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나무를 베기는 한순간이다. 독일은 두 차례의 파괴적인 대전쟁을 경험했다. 뒤셀도르프도 그 피해를 본 곳이다. 그래도 이런 풍요로운 나무들이 남아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과거 침략.지배의 경험이 있는 나라에는 풍요로운 녹지가 남아 있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가 지금도 전쟁의 상흔을 안은 채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면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래의 풍요로움을 위해 각별한 각오로 어린 나무들을 키워야 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전 세계는 레바논을 포기하려는 것인가.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는 커다란 삼나무가 그려져 있지만 TV가 방영하는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와륵(瓦礫:깨진 기와 조각)들뿐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현대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