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팔원(八阮)-서행시초 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팔원(八阮)-서행시초 3'- 백석(1912~95)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에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무슨 말을 덧붙이랴. 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볼밖에… 눈시울이 젖기 탓이다. 콧등이 싸해지기 탓이다. 저 계집아이가 우리 할머니일 것이기 탓이다.

<이문재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