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이야 후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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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수환 추기경이 며칠 전 지적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아니면 후진국으로 퇴보하느냐의 기로에 서있다는 진단은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 추기경은 또한 국민의 사기와 활력이 저하되고 있음을 염려했다. 1987년 6월 항쟁이래 국민의 기상과 활력이 넘치는 것을 경험해온 우리로서는 이 현실 앞에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수세에 몰렸던 권력층·재벌 등 지배세력은 발상의 대 전환을 거듭거듭 약속했다. 그 동안 강권정치에 억눌렸던 많은 부문에서 참여의욕구가 분출되었고, 이 민주화의 열망은 우리국민의 새로운 활력소로서 이를 새로운 제도로 수용할 수만 있다면 그 힘으로 어쩌면 일본을 능가하는 발전을 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년여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소수의 특권층은 발상의 전환을 실천하기는커녕 다시 구태의연해져 토지·부동산·기업공개 등의 수단으로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고, 자제와 절제의 미덕을 보이기보다 기득권의 보호와 강화에 앞장서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가하면 권위주의 청산을 내건 노 정권은 그 동안 국민이 원하는 개혁은 아무 것도 이룩하지 못한 채 「공안정국」을 선택함으로써 인신 구속과 인권유린으로 특징 되는 또 다른 강압적 권위주의에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전진이냐 후퇴냐」의 국민적 선택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후퇴란 단순히 경제지표상의 하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의 마음이 어떤 중심으로 모이기보다 흩어져 분열되는 데 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불신하며 서로에 대해 「비토권」을 행사하는 풍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의 정치력 빈곤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변혁의 호기가 왔건만 국민대중의 요구와 잠재력을 깊이 헤아려 이를 새로운 출발, 새로운 국가건설의 에너지로 결집시켜내는 정치력이 빈곤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 제도권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크게 증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5공 청산」등에 관해 그토록 늑장을 부리고 국민의 요구를 외면해 온 노 정권의 무 정견·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이미 식상했을 만큼 식상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여소 야대」의 국면에서 야당이 합심하면 많은 제도개혁을 성사시킬 수도 있는데 얄팍한 당리당략으로 야권공조를 희석시키고 때 이른 「색깔론」이나 들고 나오는 일부야당의 작태에 대해 국민은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정치인들의 머리 위에서 현명한 국민은 모든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인 역사인식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즉 1980년대 중반이래 현재와 미래는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지배층의 정당성과 권위가 무너지면서 국민의 참여와 권익이 신장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 흐름에 부응하여 우리가 역사를 순리대로 개척해 간다면 희망찬 미래가 있을 것이나 불행히도 만일 이를 가로막는 정권·정당·세력이 동원 가능한 권력과 재화로 개혁을 방해하고 국민을 분열시킨다면 우리의 미래는 진통 속에 결국 전대미문의 가공할 파시즘체제를 불러들일 위험마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퇴보의 가능성을 막고 역사적 전진을 이룩하려면 다음과 같은 점들에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현실을 뗘난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경계하고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마치 좌경폭력세력에 의해 금방 무너질 듯이 선전하는 행위는 아무리 애국심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수구세력의 자기방어와 역습의 본능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동대중 또는 「기층민중」이 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사회주의혁명의 길을 걷고 있는 듯이 주장하는 것도 현실에 눈먼 이념의 자기 도취증을 말해줄 뿐이다.
이런 백해무익한 이념의 급진화·양극화를 떠나 현실에 관심을 갖는다면 국민대중은 정치·경제·사회·통일 등 모든 면에서 신속하고 의미 있는 체제개혁을 갈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정확히 포착하는 이론 또는 이념의 개발이 요구되며 이를 둘러싼 활발한 토론으로 비현실적인 이념의 양극화를 막는 지식인의 노력과 역량이 절실히 필요하다.
둘째, 정치력의 복원으로 시급히 서둘러야 할 것은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공존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협약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없기에 오늘날 우리사회를 분열시키는 집단이기주의와 과소비 풍조가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협약은 물론 「5공 청산」과 「광주문제」의 해결이 출발점이 될 것이나 우리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요구된다. 하나의 견해를 적자면 우리의 현실에서 단순한 자유민주주의나 권위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은 충분치 않다고 보며 참여민주주의를 추진하면서 그 위에서 통일과 복지를 입체적으로 증진시키는 「참여민주 통일복지 국가」(PDUW)와 같은 미래상을 적극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셋째, 누누이 강조된 것이지만 전진을 위해서는 제도권 안의 「개혁정치」가 중요하지만 이를 격려하고 이끌며 때로는 질타하는 제도권 밖의 사회운동·시민운동이 또한 건실하게 잘 조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부·여당의 개혁실천도 매우 중요하다.
개혁의 결실이 없이 시간만 유실하고 나면 노 정권은 머지않아 극심한 비난과 반발에 부닥칠 것임을 명심하고 이번 토지공개념을 둘러싼 입법에서만은 중산층의 조세저항 같은 맹랑한 이유를 들어 개혁의지를 변질시킬 것이 아니라 95%의 국민대중편에 서서 경제정의의 토대를 확실히 놓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는 국민의 기대와 정치제도 사이의 균열이 다시 벌어지는 상황이다. 정부·여당이 개혁에 성의가 없고 야당마저 당리당략으로 힘을 모으지 못한다면 개혁을 진정으로 원하는 국민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혁명이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게될 것이다.<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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