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편하게 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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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문현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미성년 시절의 고통을 성년이 되어 축소 평가하고 싶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는다고 느끼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내가 안타까워 나라도 이해해 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십 년도 지난 수능 날의 고통을 끄집어 내본다.

그 날은 12년의 제도권 교육을 어깨에 몽땅 짊어진 채, 앙상한 외나무다리를 편도로 건너는 날이었다. 저 뒤로 육지에서 ‘수능 대박’ 팻말을 흔드는 선생님, 부모님과 점점 멀어진다.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독의 길. 아, 옆 사람 콧물 훌쩍이는 소리와 뒷사람 다리 떠는 소리도 들린다. 지나온 길 한 번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한 번만 삐끗해도 세차게 흐르는 패배의 강물로 떨어진다. 저 멀리서 부모님이 보면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여기로는 대통령 할아버지도 구하러 와줄 수 없는 현존하는 가장 공정한 시험이다. 잠깐, 이럴 시간이 없다. 십 분 남았는데 뒷장 아직 못 봤다.

“수능 대박” 목소리가 커질수록 ‘미대박’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던 것을 기억하는지. 벌겋게 시험 치르고 나와 처음 마주한 것은 차갑고 어두컴컴한 겨울 공기 속 ‘수능 대박’ ‘잘 보세요’ 같은 현수막들이었다. 집에 못 가겠어. 지구 종말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1999년 12월 31일 오후 11시 45분의 심정으로 PC방엘 갔다. 집이 따뜻한 걸 알아도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발걸음엔 버거운 부담감과 걱정이 묵직한 모래주머니처럼 매달렸다. 그 시절 고통을 잊고 성년이 된 우리가 영혼 없이 또 “수능 대박”을 응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대박이 안 나도 별일 없는 삶을 살았으면. 노력했다는 사실이 변함없기에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면. 자신에 대한 존중감도,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축하받아야 할 졸업도 그대로이길. 어차피 대학 좀 잘 간다고 용 되는 승천길에 오르는 것도, 탄탄대로 취업길이 열리는 것도 아닌 세상, 어떤 결과가 나와도 천지가 개벽하지도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걸 말해주자. “편하게 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