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기」사상 화폭에 담았다-철학박사화가 이종상씨 호암 갤러리서 개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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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화가 일랑 이종상씨에게 올 한해는 그의 역정을 기록하는 인생 바로미터의 진자가 가장 큰 폭으로 흔들렸던 성취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지난 8월26일 그는 동국대에서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논문『동양의 기 사상과 기운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 화가로서는 첫 예를 보인 사건(?)의 여운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이달 20일부터는 이 이론의 정당성을 가시적으로 검증해 보이기 위한 대규모 초대 개인전을 호암 갤러리에서 갖고있다.
그가 동양의 기 사상에 주목, 이를 작업의 명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부터의 일. 동양철학에서의 기란 모든 생성과 소멸의 변환과정을 포섭, 내재시키는 우주·자연의 본원이며 따라서 동양적 예술미학의 이론도 결국은 거기서 뻗어져 나온 하나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그에게 이론 구명작업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를 주었다.
석도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통화론인 기운생동론도 따지고 보면 기 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그는 학위논문에서 이 기와 기운생동논의 상관관계를 꼼꼼히 더듬어 결국『그림을 이루게 하는 것은 미적 기교가 아니라 예술가의 신기(신바람)와 심기(얼)를 바탕으로 하는 미적영감』이라는 이른바 의재필선(뜻이 붓에 앞선다)의 미학원리를 논증해내는데 성공했다.
『60년대에는 발로 그림을 그렸고 70년대에는 머리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진실 된 그림에는 인간의 뜨거운 가슴이 담겨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그림을 관철할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찾는 과정에서 마침내 관자이래 동양사상의 중핵을 이뤄온 기 사상에 주목하게됐다.
자연의 모든 것은 바로 기의 현현이며 이 기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과 예술을 낳는 원천이다』고 그는 말한다.
77년의 동산방전으로부터 꼭 12년만에 갖게 된 이번 개인전을 그는『벽화』『기』등 자신의 예술적 궤적을 더듬게 할 60∼70년대 시리즈작품 몇 점을 빼고는 모두 80년대에 제작한 『원형상』연작들로 채워놓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특별히 그의 천성에서 발단하고 있음직한 호방한 스케일과 매재확장을 향한 강한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장지에 수묵과 채색, 그리고 동판 위에 칠보를 입혀 제작한『원형상』3점은 가로 12m, 세로 4 m에 이르는 초 거작으로 지난 2일 법원 신 청사 로비 벽면에 걸려 크게 화제가 됐던벽화와 크기가 똑같다.
이번 전시회에 대거 선보이고 있는『원형상』시리즈는 우리의 고지도 혹은 만산도에서 볼수 있는 산세와 길·물줄기 등의 상형이 어우러진 비교적 낯익은 도상들로 짜여져 있다. 『우리 땅에 대한 사람을 바탕으로 거기 깃들인 각양의 기, 삶과 죽음의 합일성 가운데서 우리문화, 우리풍토, 나의 정신적 근원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게 그의 작의설명이다.
『원형상』시리즈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양재래의 삼원법을 훨씬 넘어서는 그의 독특한 시방식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소위 ,백감의 이 시방식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삼원법이 형이하학적·도식적 자연관이 빚어낸 정신력부재의 막힌 시각인데 비해 이를 절대자유와 영혼의 눈으로 상하좌우 없이 활짝 열어놓은 4차원적 이동시각 내지는 직관의 시각이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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