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더한 도청시비|신종오<생활과학부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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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야당 의원들이 한국전자통신연구소 국정감사에서 도청장치로 알려지고 있는 소위「블랙박스」에 대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도표까지 동원해 기세 등등하게 질문공세를 펴 이 문제가 큰 논쟁거리가 됐다.
3, 4, 5공화국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악용돼 오던 도청이란「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도청시비는『연구기관에 의뢰해 개발된 어떤 장치가 각 전화국에 설치돼 도청에 이용되고 있다』는 평민당에 대한 제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는 판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국감을 앞둔 야당의원들에게는 좋은「거리」가 생긴 터여서 이번 국감에서 사실여부를 명백히 가려 줄 것을 국민들은 기대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갑자기 기세가 수그러져 궁금증을 더하게 했다.
감사에서 경상현 소장과 문제의 46억 원 짜리 연구(비 음성 정보의 전송. 품질측정시스템)를 수행한 강철희 박사를 증인으로 출석시켜 집중 추궁을 벌였지만 4시간동안의 감사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비공개회의후 한 야당의원은『국내인 상호간의 통화와는 관계가 없는 장치이며 통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도청용으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의원도 있었고, 도청용이라고 세인의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는 의원도 있었다』고 아리송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도 과기처감사에서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이 문제는 어쩌면 연구를 맡긴 한국전기통신공사의 감사 권 자인 국회교체 위와 연구수행기관의 감사 권 자인 경과위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으로 이어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당초 이 블랙박스 사건은 한 젊은 연구원의「양심선언」이 진원지로 알려져 있는 데다 경 소장이『도청장치에 이용할 수 있느냐』는 야당의원의 질문에『과학기술은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쓸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고 했다가 잠시 후 이를 번복한 점이 더욱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한두 가지 장치만 덧붙이면 도청에 이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완강히 부인하지 않은 점, 연구계획서·설치장소 등의 자료제출을 거부, 답변자의 오만한 태도 등 이 의원들의 의심과 심기불편을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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