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치 금융의 유산도 청산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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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은행의 부실채권이 3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은행 총 여신의 4·6%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은행의 부실채권이란 무엇인가.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었다가 제때에 받지 못하게 된 돈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부실채권문제는 은행의 내부 경영상의 문제다.
받지 못할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것은 돈을 빌려준 은행의 잘못이고 은행경영자의 책임으로 끝날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지금 은행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이 오늘의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관치 금융의 유산이고 그 폐해가 국민경제 전체에 미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60년대이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정부가 자금의 배분 권을 전담해 왔다. 그리고 시장기능을 무시한 정부의 정책금융·특혜융자는 본의와는 관계없이 부실기업을 양산했고, 다시 그 부실기업을 구제·정리하는 과정에서 베푼 금융 특혜가 지금의 방대한 부실채권을 결과하게 된 것이다.
부실채권의 직접적인 폐해는 물론 은행의 부실화와 공신력의 저하다. 시중은행 중에는 부실채권 규모가 납입자본금을 상회하는 곳도 2개나 된다.
이래가지고 은행의 건전한 경영을 기대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부실기업에 방대한 자금을 쏟아 붓는 것이 국민의 도덕감정에 반하고 국민경제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건실한 기업들이 살을 깎는 노력으로 사업을 키워 나가며 비싼 이자를 꼬박꼬박 지불하고 있는데 경영을 잘못해 부실화된 기업이나 이를 인수한 기업에 대해 이자면제·상환기한 연장 등의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형평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정부는 경제력 집중과 여신편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대기업으로부터 강제로 대출금을 회수하고 있다.
지나친 경제력 편중을 막아야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쪽에 부실채권을 방치한 채 추진되어서는 설득력이 반감된다.
부실기업은 온갖 금융특혜를 베풀면서 건실한 기업에 대한 융자금은 강제로라도 회수해야겠다는 것은 금융질서가 제대로 잡힌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 한심한 일은 부실기업으로서 대출금상환연기의 혜택을 받은 일부 기업이 만기가 되어 상환요구를 받고도 이를 거부, 결국 재연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풍토가 개선되지 않고는 건실한 금융질서의 확립은 요원한 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실기업이나 이를 인수한 기업이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는다는 것은 건실한 기업들이 융자받을 수 있는 자금을 그만큼 잠식하는 셈이 된다.
그 결과가 우리경제의 성장저력과 기업의 신장에 장애요인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은행의 부실채권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는 86년2월 산업정책심의회에서 은행의 부실채권을 3년 내에 완전히 정리하기로 결정하고 국민들에게 그 같은 사실을 발표한바 있다. 그러나 그때의 약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언반구도 없는 채 3년 기한이 지난 2월로 지나갔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관치 금융의 악폐를 깊이 반성, 건전하고 자율적 금융풍토조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동시에 부실채권문제도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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