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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대<비상임 논설위원>-청부가 국부를 일으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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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청빈은 예찬할 만한 미덕인가. 아니다. 안빈락도가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숭상할만한 생활지표 일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 일각에는 부에 대한 사시와 빈정거림이 사라지지 않은 채 차라리 청빈 쪽에 더 많은 점수를 주려는 자조와 분노의 심사마저 엿보인다.
이런 심사를 정면으로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무엇보다 탁부 내지 탁재의 엄연한 존재와 부의 축적을 위한 기회의 불균등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의 세습과 가난상속의 규칙성과 필연성이 남아 있는 한 경제적 기회균등의 실현은 어렵고 산에 대한 소외계층의 저항심리는 존속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비록 그 범위가 국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빨리 극복되어야 할 사회적 병폐임에 틀림없다.
아직 미흡한 수준이긴 하지만 개미처럼 일해서 소중한 청부를 쌓아온 중산층이 돼 넓은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는 만큼 이제 탁부에의 대항개념은 청빈이 아니라 청부로 대치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부의 구성을 탁부 축소, 청부증대로 바꿔 가는 이른바 부의 정화작업이 꾸준히 추진되어야 한다.
지금 한창 열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토지공개념 도입도 이런 맥락에서 그 사회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탁재는 그 자체가 불로소득·부당이득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불로소득의 원천이 된다. 사회적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민부 정하의 계절이 오면 호재는 당연한 생존본능에 따라 필사적인 자구활동에 나선다.
이래서 탁재는 권력 또는 지위에 의한 불로소득을 파생시킨다. 탁재가 지니는 왕성한 번식력의 이치를 터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각종 이권거래, 뒷구멍 정치자금수수를 통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탁재의 순환이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탁재의 길목에 전혀 손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전모를 알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탁부의 광범한 존재와 그것의 번식력, 그리고 번식의 생리가 이렇듯 뻔한 일이라면 이에 대처하는 작업은 재산세중과를 중심으로 한 토지공개념 도입만으로 될 수는 없다. 이에 앞서 그 작업은 정계와 공직사회를 필두로 한 사회전체의 정화운동으로까지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로소득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기도 한 부의 정화작업은 사회정화작업의 범주로 넒혀질 때라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추진키로한 공직가 사회의 비리척결이 바로 이런 안목에 입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 시선성은 높이 살만 한 것으로 보인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토지공개념 도입을 둘러싼 정부·여당의 협의과정과 여야의 입장표명에 대해 국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엄청난 일이 혹시라도 탁부 수호의 로비에 걸려 굴절되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정당별로, 그리고 이익단체별로 제시되는 입장과 견해의 진실성을 가려내는 일이다. 방법상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순수한 의도와 방법상의 조치를 들어 본질을 흐리게 하려는 시도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기술적 문제해결에 있어 한가지 분명한 원칙은 재산세부과에 있어 탁재와 청재를 가려내어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의 현실적 적용은 무척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지만 양자를 획일적으로 다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흔적은 남겨야 한다.
부의 정화에 있어서는 탁부에 대한 규제 못지 않게 청부의 장려가 절실히 요청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겠다는 욕망을 부추겨주는 일이야말로 경제성장과 민복증대의 핵심에 해당한다.
그 욕망의 좌절이 국민경제의 침체를 결과한 사례를 우리는 도처에서 보아왔고 최근에는 소련이 이 문제의 해결에 안간힘을 다하고있다.『국민은 더 많이 벌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번 것은 개인이 차지해야 한다. 동시에 스스로 벌지 않은 것을 개인이 갖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말이다. 그는 소련의 활로를 청재 인정과 불로소득 근절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탁재와 불로소득의 비중은 나라별로 다르고 그것을 사는 사회적 수용능력도 민족마다 다르다. 우리 국민들의 이에 대한 거부감이 남달리 예민한 깃은 사회공동체의 건실한 발전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놀고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우리 조상들이「빈둥빈둥」이라는 의태어를 만들어냈을까. 많지 않은 의태어 중의 하나를 할애해서 한량들의 게으름을 지칭하도록 한 것은 그것에 대한 혐오감이 그만큼 강렬했음을 말해준다.
그 혐오감의 밑바닥에는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그 힘드는 정도가 사람마다 비슷비슷해야 한다는 평등의식이 깔려 있다. 조상들의 그런 마음을 물려받은 것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불로소득이 없는 사회, 청부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쉽게 이어진다.
토지공개념과 세제개편의 과정에서 치열하게 전개 될 각 이익집단들간의 논쟁은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 부의 가치관을 소중히 여기고 총체적 국부형성의 힘이 바로 여기서 나와야 된다는 대의를 논의의 바탕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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