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비행기 안타면 일본 안 갈래요"|조훈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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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입단을 한 것은 9세 때였다. 서울로 올라온 지 4년 만인 1962년. 7세 때부터 한국기원에 출입하기 3년, 입단대회에 출전하기 세 번째 만이었다. 당시 최연소 입단이라고 해 화제가 대단했고 일본과 중국을 합쳐서도 아직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입단을 전후해 당시 야당의 거물이었던 정해영 선생 댁과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댁에서 각각 약 1년씩 기거했다. 나는 국민학교를 삼선·혜화·덕수 등 5군데나 옮겨다녔는데, 정·박씨 등 나를 후원해 주는 정계 실력자들의 집 근처로 가족들이 이사를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야채장사를 하셨고 누나들은 회사 사환으로 나갔으며 형도 고등학교만을 나왔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큰누나도 등록금 댈 길이 없어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가난한 살림이었다. 일제 때 동경유학을 했을 만큼 당신의 고향인 전남 영암일대에서는 알아주는 갑부소리를 듣기도 했다는 아버지는 모든 희망을 나한테 거시는 듯했다.
정해영씨 댁에 있을 때 입단했는데 김수영 6단과 함께였다. 3, 4급 정도의 기력이었던 정씨와는 대국한 기억이 별로 없다. 정씨 자신이 야당의 중진의원으로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박종규씨는 4, 5급 정도의 기력이었는데 박씨와는 여러 번 대국했던 기억이 있다.
정씨 이상으로 바쁜 직책에 있는 박씨였으므로 밤에나 가끔 볼 수 있었는데 꼭 내기바둑을 두자고 했다.
그것도 집내기로 한집에 1원씩을 걸고 두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열살 때인 1963년이었다. 2단으로 승단 해 있었지만 대국을 해 생기는 수입은 거의 없었고, 나는 여전히 만화책과 군것질에 탐닉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박순조씨 라는 재일 교포의 주선이었다. 바둑을 국기로 여겨 프로기사를 예우해 주는 일본에 가 본격적인 공부를 해 바둑의 세계1인자가 되어 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계셨다.
『일본에 가겠느냐?』
아버지가 물어 오셨고, 내가 되물었다.
『비행기 타고 가나요? 배타고 가나요?』
『뭘 타고 가든 어쨌든 일본에 가겠느냐?』
『싫어요.』
나는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비행기 태워 주면 가고 배 태워 주면 안 갈래요.』
『오냐, 비행기 태워 주지.』
동경에 있는 박순조씨 댁에서 2, 3개월 머물렀다. 조치훈 9단은 나보다 6개월 먼저 동경에 와 있었고 김인 국수 또한 목곡 도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목곡 도장에서는 당연히 내가 그곳에 오는 것으로 알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랬는데 김희운씨 라고 박씨 아들의 친구 되는 이가 나를 세고에 겐사쿠 선생 댁으로 데리고 갔다. 김씨는 바둑은 모르는 이였으나 고학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사회의 물정에 밝았다. 그 뒤로 짐작하게 된 것이지만 김씨는 뇌월 선생이 목곡 선생보다 한 수위라고 봤던 것 같다.
반드시 바둑 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분 일본바둑계의 거목들이 일본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 곧 격을 얘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뇌월 선생은 처음에는 『나는 나이도 많고 몸도 불편하다. 목곡 도장이 한국인을 받아 온 전통이 있으니 그리로 가게 하라』며 거절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김씨가 하도 간곡하게 여러 번 부탁을 드리자 『그러면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해서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3점을 놓고 시험기를 두게 되었는데 내가 이겼다.
『3점 치수가 아니다』며 다시 2점을 놓고 두었으나 역시 내가 이겼다. 당시 73세셨던 뇌월 선생이 말씀하셨다. 『내가 연로하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죽을 때까지 돌 봐주겠다.』선생은 히로시마 원폭투하 때 방사능낙진을 쬐어 한쪽 눈이 거의 안보이고 한족 귀가 안 들리는 상태이셨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선생은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아이는 적어도 오청원과 버금가는 기재다. 아니, 오청원을 뛰어넘는 기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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