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외교브레인이 멀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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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련의 대 한반도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9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외교정책 입안자인 게오르기 아르바토프 미·캐나다연구소장이 방한한데 이어 10일 소련 전 외무차관 미하일 카피차 동양학연구소장이 내한했다.
아르바토프는 안드로포프 서기장 시절에는 소련 내에서 동서문제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 실력자였다.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다소 위치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향력 있는 회교브레인이다.
카피차 전 외무차관은 중국 대사관에 두 차례 근무, 파키스탄대사·외무성 제1극동부장을 지냈으며 차관시절에도 동북아를 담당한 경력이 말해주듯 소련의 대 아시아정책의 「황제」 로 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차관 재임기간 중소화해의 길을 터놓았으며 지난84년 북한을 방문, 소-북한 밀월시대를 여는 등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아시아 국가들에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대한정책을 다루는 소련의 양대 핵심이 동시에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의 방한은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의 동양학연구소· IMEMO (세계경제 및 국제문제연구소)·극동문제연구소·미-캐나다연구소가 공동으로 수립하고 있는 대한정책이 이제 북한의 눈치 같은 것은 보지 않고 가시화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소련의 대한정책에 점진적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카피차는 올해 초 소련시사종합지 노보에 브레미야 (신시대) 의 「전망89」란 기고를 통해 89년도 동북아에서 예상되는 가장 큰 변화로 ▲중소정상회담 성사 ▲캄보디아문제 해결▲남북한 최고책임자회담의 성사 등 3가지를 꼽았었다.
이중 중소정상회담은 지난 5월 이루어졌고 캄보디아 분쟁 해결을 위해 파리에서 회담이 진행중이다. 따라서 카피차가 방한기간 중 마지막 남은 과제인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모종의 접촉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소련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에 실린 한국관계 논문은 이런 추측에 신뢰성을 더해주고 있다.
개인견해로 발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남북한 교차승인을 배제하지 않고 있고▲소련의 한국과의 수교를 강조하는 등 한국 측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소련외무성의 공식부인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한반도에서 2개의 정부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한 소 접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북한에 대해 점차 투약의 강도를 높여 면역성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변화는 방한하는 소련 인들의 자세에서도 나타난다.
올 들어 내한한 소련 인은 학자·경제인·언론인·예술단 등 줄잡아 3천여 명이다. 이들은 2,3개월 전만 하더라도 언론 등에 노출되는 것을 몹시 꺼려했지만 이제는 아예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며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련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물급 인사들의 잇따른 방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아르바토프 소장이 『한국기업이 대소진출에서 정치적 전제조건, 특히 비현실적인 조건들을 붙이는데 대해 소련은 당혹해 하고있다』고 발언하는 것 등으로 볼 때 대소진출을 꾀하는 한국의 기업인들을 부추겨 우리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게 하고 있다.
따라서 카피차등의 방한을 한 소 관계 개선의 유용한 기회로 활용하면서 소련의 정경분리 공세에 휘말리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두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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