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시집 『무림일기』펴낸 유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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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참 세상 많이 좋아졌지/절로 말이 새어 나오게 시리/라디오 디제이까지 청취자에게 속삭인다/오공비리로 4행시를 지어주시죠.//대세가 결판나서 그런가?/오공의 털로 만들어진 손오공 놈들까지도/이젠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고/근두운 타고 날아가듯 벗어나야 한다고 떠드는 오공, 오공, 오공시대/참 많이 부드러워졌어/체제의 손바닥』(「오공시대」전문).
무림천하를 방불케 하는 우리의 80년대를 가벼운 유희정신으로 풍자한 「무림일기」로 88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 등단한 시인 유하씨가 첫 번째 시집 『무림일기』를 펴냈다.
유씨는 가위 천부적인 언어 다룸 솜씨와 유희정신으로서 범상한 소재와 깊이이면서 시에서 일단 읽는 재미를 갖게 한다. 기실 시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도 있을 것인가.
시적인 재미는 시인이 어렵사리 숨겨놓은 지적인 트릭을 풀고 시적 진실에 다가서 독자 스스로 문화적 교양에 만족할 때 찾아드는 지극히 지적조작 과정에 의한 것이라는 게 통념이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이러한 통념과는 달리 유씨의 시를 접하면 마치 재미있는 무협소설이라도 읽듯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유씨 시의 읽는 재미는 위시 「오공시대」에서 볼 수 있듯 우선 「오공」→「손오공」→「손바닥」등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따라 흐르는 단선적인 언어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문화적 교양 없이도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이야기와 현실의 정확한 일대일의 풍유로 그의 언어적 상상력은 말장난과 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대중적 흥미를 유발시킨다.
『80년대 한복판을 캠퍼스에서 보내면서 처음에는 민중시를 써 보았습니다. 내뱉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는 구호와 달라 무언가 시적인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결국 만화·영화·무협소설 이야기 등에 빗대 현실을 반성해 본 것이 내 시입니다.』
유씨는 물론 그의 천부적 언어재능도 있지만 그렇게 싸구려 이야기에 잘 대입되는 코미디 같은 80년대가 우스웠다고 한다.
『포르노엔 지배자들이 살포하는/포르말린 냄새가 배어 있다/심야다방 여관 만화가게마다/절찬리 상영중인 깊이 더 깊이 피스톤 신화/단속반이 뜨면 헉헉대는 화면은 잽싸게/보도본부 24시로 바뀌지/오늘도 반복되고 있을 포르노와 뉴스/그 충돌의 몽타아즈』(「파리애마」중). 포르노와 뉴스의 접목, 현실인지 포르노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80년대가 결국 80년대 시단을 지배했던 민중시와 해체시를 교묘히 결합시킨 유씨의 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화를 전공하고 있으므로 흥행에 신경을 씁니다. 타성에 빠질 위험을 경계하면서 계속 재미있는 시를 쓰겠습니다.』
63년 전북고창 출신인 유씨는 현재 동국대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중이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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